신 고전주의

신 고전주의

Néo-classicisme 

고전주의는 본래 이탈리아 토양에서 자란 것이었지만, 신 고전주의 사조의 영향은 주로 프랑스에 집중되었다. 장식적이고 화려한 ‘로코코 문화‘에 반대하여 고전 주의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회화, 조각, 건축 전반에서 고전 양식을 부활시키며,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본보기로 내용보다 형식을,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한 이 사조는 ‘낭만주의의 출현과 함께 19세기 초에 막을 내렸다. 신 고전주의 스타일의 질서와 고귀함이 당시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개진한 이성에 대한 믿음과 도덕적 가치들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신 고전주의 미술의 특징은 주제에 있어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교훈적인 역사, 신화를 채택하였으며, 구성에 있어서는 고전 양식과 마찬가지로 겹겹이 단계가 있어야 하며, 인물과 인물 사이의 간격에도 질서가 있어야 했다. 색채보다는 구성, 선을 중시하였으므로 묘사력과 데생이 강조되었다. 마무리의 처리가 중요하게 여겨져 붓 자국이 없는 매끈한 표면 처리 또한 신 고전주의 양식의 한 특색을 이룬다.

‘‘1738년 로마 시대의 마을인 ‘헤르쿨라네움 Herculaneum’이 발굴된 데 이어, 1748년에 ‘폼페이 Pompeii’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전적 또는 고전적으로 보이는 물건들에 대한 유행이 시작되었다. 또한 동방으로의 여행이 잦아지면서 ‘그리스 문화에 대해 높아진 관심도 고전주의의 부활을 부추겼다. 이러한 고대에 대한 애호의 분위기 속에서 학자들은 저술 활동을 통해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고…..

독일의 미술사가 ‘빈켈만 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68)은 『그리스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의 모방에 관한 연구』(1755)와 『고대 미술사』(1764)를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미 자연의 이상화를 이뤄낸 ‘그리스 미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전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혁명 전후 프랑스 사회 전반에는 고대에 대한 동경이 풍미하였다고…..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면서 신 고전주의 운동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을 혁명 정부의 미술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신 고전주의 양식의 주창자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는 혁명 지도자 <마라의 죽음>(1793)과 같은 작품을 통해 혁명을 선전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1세’ 제정 시기에 수석 화가가 되어, 로마 황제를 동경했던 ‘나폴레옹’의 취향에 따라, 제국의 영광을 과시할 수 있는 위압적이고 화려한 화풍을 선보였다.

‘다비드’를 잇는 신 고전주의 화가로는 ‘피에르 폴 프뤼동 Pierre-Paul Prud’hon’ (1758-1823)과 ‘다비드’의 제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re’ (1780-1867)가 있다.

‘프뤼동’은 고대의 서정적인 주제를 부드러운 화풍 속에 담았으며, ‘앵그르’는 여성 누드화를 주로 그리지만, 지나치게 부드러움과 우아함을 강조하여 고전적이라기보다는 ‘매너리즘 문화에 가까웠다고….

한편 신 고전주의 스타일의 장엄한 양식은 회화뿐만 아니라 동시대 조각에도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카노바 Antonio Canova’ (1757-1822)와 ‘트로발트젠 Bertel Thovaldsen’ (1770-1844)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다비드’, ‘우동 Jean-Antoine Houdon’ (1741-1828) 등이 신 고전주의 양식의 조각 작품을 만들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