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유수 (교황)

아비뇽 유수 (교황)

11세기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로마 교황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국왕의 권력 집중 현상이 심화되던 시기에 프랑스 왕 ‘필립 4세’ (Philippe le Bel)는 프랑스의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요구하면서 로마의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 (Boniface VIII)와 대립하게 된다.

이에 ‘보니파시우스 8세’가 1292년 ‘성직자에게 세금을 무는 세속 지배자와 교황의 승인 없이 세금을 납부하는 성직자는 함께 파문한다’는 칙령을 발표하자, ‘필립 4세’는 교황청으로 가는 모든 물자의 교역을 끊는 보복조치를 시행하고, 삼부회의를 소집해 ‘보니파시우스 8세’의 교황선거가 위법이라는 이유로 교황에 대한 파면을 선언한다.

이어 ‘필립 4세’는 ‘아냐니 사건’으로 불리는 교황납치 사건을 벌인다. 이 사건은 여론에 반감을 사 교황은 이틀 만에 풀려나지만 그 여파로 교황은 수 주일도 못 돼 숨을 거두고 만다.

‘필립 4세’ (Philippe le Bel)는 보르도 추기경인 ‘클레멘스 5세’ (Clément V)를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다방면으로 압력을 넣는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7세’의 침략(1310~1313)으로 ‘클레멘스 5세’ 교황은 로마로 가지 못하고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영토와의 경계에 위치한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에서 떠돌아 다닌다.

1316년에 ‘요한 22세’ (Jean XXII) 교황으로 선출되어 1317-1333년에 아비뇽에서 북쪽으로 약 20㎞ 떨어진 작은 마을에 여름 궁전을 건설하고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샤토뇌프 뒤 파프’ (Chateauneuf du Pape)는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뜻이다.

교황령의 경제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카오르’ (Cahors)에서 은행가와 포도주 양조업자를 ‘아비뇽’으로 데려온다. 이들은 1307년 ‘필립 4세’ (Philippe le Bel) 프랑스 왕에 의해 쫓겨난 템플기사단이 남긴 ‘샤토뇌프’ (Châteauneuf) 마을에 버려진 부지를 되찾아서 포도나무를 심었고 점점 포도주의 품질이 향상되고 유명해진다.

‘클레멘스 6세’ (Clément VI)교황이 1348년, ‘프로방스 백작부인’이자 시칠리아의 여왕이던 ‘잔’ (Jeanne)의 남편독살 의혹을 사면해주는 조건으로 ‘아비뇽’ 도시를 저렴하게 사들여 교황청을 세운다. 이런 아비뇽 유수는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Grégoire XI)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종식된다.

  1. 클레멘스 5세 (Clément V): 1305 – 1314
  2. 요한 22세 (Jean XXII): 1316년~1334년
  3. 베네딕트 12세 (Benoît XII): 1334년~1342년
  4. 클레멘스 6세 (Clément VI): 1342년~1352년
  5. 인노첸시오 6세 (Innocent VI): 1352년~1362년
  6. 우르바노 5세 (Urbain V): 1362년~1370년
  7. 그레고리오 11세 (Grégoire XI): 1370년~1378년

서방교회 대 분열 (1378~1417)
교황이 로마로 돌아간 후 아비뇽과 로마에 2명의 교황이 존재하던 ‘서방교회 대 분열’ (1378~1417)이 종식되고 교황이 없어진 아비뇽과 ‘샤토뇌프’는 성을 유지하려는 의지와 자원이 부족했다.

  • 클레멘스 7세 (Clément VII): 1378-1394
  • 베네딕트 13세 (Benoît XIII): 1394-1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