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느강 우안에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샹젤리제 거리의 시작점이며, 동쪽으로는 뛸르리 정원의 끝에 위치한 꽁꼬흐드 광장은 지리적 여건과 정치적 목적에 따라서 격동기의 다양한 사건과 행사가 진행된 곳. 지리적 위치를 고려해보면, 북쪽으로는 몽마르트르 언덕을 연결하고 남쪽으로는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하원의회 건물과 마들렌느 대성당을 연결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뛸르리 정원과 루브르 박물관, 서쪽으로는 샹젤리제와 라 데팡스 신도시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일년 행사 중 가장 중요한 ‘혁명 기념일 행사’에는 군사 퍼레이드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오벨리스크’ 밑에 대통령을 포함한 내각과, 연례적으로 한명씩 초청하는 국빈이 조립식 사열대에서 군의 사열을 받는 곳이다.

‘꽁꼬흐드 광장’에서 ‘뛸르리 정원‘에 들어가 산책을 하며 ‘루브르 박물관’쪽으로 걸어가보는 코스도 운치가 있고, ‘샹젤리제 거리‘를 통하여 ‘개선문’까지 산책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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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적인 면에서 보면, 꽁꼬흐드 광장 건설은 파리시내에서 ‘로코코’ 양식이 끝나가고 새로운 ‘절충주의’가 시작되던 시기에 만들어지는데, 이 광장의 이름은 여러 번 바뀐다는데, 최초에는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다가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혁명정부가 1792년 8율 10일부터는 ‘혁명광장 Révolution’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나폴레옹 1세 시절에는 본래의 ‘루이 15세 광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왕정복고시기에는 ‘루이 16세’ 광장으로 불려지다가. 7월 혁명이 일어난 1830년에는 ‘헌장 Charte’ 광장으로 불렸다가 7월 왕정이 들어서면서 드디어 ‘꽁꼬흐드 Concorde’ (화협. 화해) 광장으로 바뀐 것이다.concorde-10

또한, 광장을 장식하는 조각품들과 광장 중앙에도 처음에는 ‘루이 15’세 기마동상이 세워졌다가.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었고 루이 16세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현재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 obélisque de Louqsor’가 세워진 것이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대리석 업자들이 사용하던 포구로 연결되는 단순한 넓은 공터이었는데, 루이 15세가 동부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 ‘메츠 Metz’에서 얻은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광장에 루이 15세의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1748년에 17명의 건축가들이 참여한 설계공모전을 여는데, ‘가브리엘 Gabriel’의 설계 안이 당선되었고, 조각가 ‘삐갈 Jean-Baptiste Pigalle’에 위하여 완성된 루이 15세의 기마동상이 광장 가운데 세워진다.꽁꼬드 광장

역사

아직 광장이 미완성이던 1770년 5월 30일, 이 광장에서 장차 ‘루이 16세’가 되는 왕세자와 ‘마리 앙뚜와네트’의 결혼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리는데, 쏘아 올린 불꽃놀이의 파편에 의하여 화재가 발생하자 놀란 대중들이 서로 먼저 빠져 나가려는 아비규환 속에 133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한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이 광장이 중요한 장소로 떠오르는데, 다양한 행사와 모임이 치러진다. 10월 6일에는 흥분한 시민들에 의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와네트’의 가족들이 이 광장을 통과하여 루브르 궁전으로 압송된다. 1792년 8월 11일, 이 광장의 주인이던 루이 15세의 동상이 철거되어 제철소의 용광로로 들어갔으며, 그 자리에는 ‘르모 François-Frédéric Lemot’ 조각가의 ‘자유의 여신’ 작품이 새워지면서 이 광장을 ‘혁명 광장’이라고 불린다.꽁꼬드

광장의 조각

혁명정부 말기에 광란의 공포정치로 수 많은 사람들과 왕족들을 처형한 정치적 색깔 때문에 이 광장의 조각들도 여러 번 바뀐다. ‘루이 15세’의 동상에서 자유의 여신으로 바뀌었으며, 나폴레옹 시절에는 자유의 여신을 철거하고, 프랑코 왕국을 세운 ‘샤흘르마뉴’ 대제의 동상이 들어선다.

왕정복고를 한 ‘루이 18세’는 자신의 형인 ‘루이 16세’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순교당과 작은 성소를 포함한 동상 건립을 계획하고, 동생인 ‘샤흘르 10세’ 시절인 1826년 공사를 시작하지만,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꽁꼬드 광장

이집트의 선물, 오벨리스크

꽁꼬흐드 광장 중앙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Obelisque’는 23 미터의 높이에, 무게가 230 톤이나 나가는 단일 화강암으로 ‘람세스 2세 Ramses II’의 치적을 상형문자로 적어 놓은 것이다.꽁꼬드 광장 오빌리스크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마지막 왕인 ‘샤를르 10세’ 에게 ‘기린’을 선물로 보내었던 이집트의 부왕 ‘알리 Méhémet Ali’ 정부가 ‘룩소르 Louksor’ 신전에 있던 ‘오벨리스크 Obelisque’ 를 1831년 프랑스에 선물하였고, 바다를 가로질러 1833년 12월 21일 파리에 도착한다. 약탈이 아닌 선물!!!!  왜? 무엇때문에 선물을?

본래는, ‘뽕네프 다리‘ 중앙에 세워질 계획이었다가, 당시 왕이던 루이 필립이 바로 이 꽁꼬흐드 광장에 세우기로 결정하는데,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던 이 광장에 어떠한 정치적 사건도 연상시키지 않는 오벨리스크를 20만 명의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36년 10월 25일 세운다.
꽁꼬흐드 꽁꼬드 콩코드 광장

1836년부터 1846년까지 10년 동안 이 광장을 새롭게 단장하는데, 본래 건축가 ‘가브리엘  Gabriel’의 의도를 존중하면서 두 개의 분수를 추가한다. 북쪽의 분수는 포도와 밀을 수확하는 모습과 ‘핸 Rhin’ 강과 ‘론 Rhône’ 강을 상징하는 조각이 보인다. 프랑스 8대 도시의 여신상들이 프랑스의 발전을 위하여 회의를 하는 모습으로 광장 주변에 놓여진다.꽁꼬드 광장 베드로 분수

단두대가 설치된 것은 언제일까?

본래 까루젤 광장에 설치되었던 단두대가 이 광장에 처음 설치된 것은 프랑스 왕정의 문서 및 보석을 보관하던 ‘Garde Meuble’에서 왕관의 푸른 다이아몬드를 훔친 도둑들을 처형하기 위하여 1792년 10월에 이 자리에 세워진다. 감금상태의 루브르 궁전에서 탈출하여 처갓집인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다가, 농부의 기지로 붙잡히어 파리로 압송된 ‘루이 16세’를 1793년 1월 21일 처형한다. 하필이면, 선대왕인 루이 15세 기마동상이 놓였던 좌대 밑에 단두대를 설치하였단다.

1793년부터 1년 동안 파리에서 처형된 총 2,498명의 사형수 중에 1,119명이 이 광장에서 처형되었단다. 루이 16세를 위시하여 마리 앙뚜와네트, 로랑 부인, 보르도의 산악당원, 사촌이던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냈던 필립 오를레앙, 혁명지도자 당통, 로베스삐에르…..

1795년에는 샹젤리제 거리가 시작되는 입구에 ‘꾸스뚜’ 조각가의 ‘말과 조련사’ 작품이 설치되면서 꽁꼬흐드 광장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꽁꼬드 광장

단두대는 누가 만들었을까?

프랑스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단두대!!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단두대의 진실을 알고가자!!!! 단두대의 기원은, 본래 이탈리아에 존재하던 것으로 두 개의 나무 기둥 사이를 초승달 모양의 날카로운 칼날이 떨어지며 사람의 목을 자르는 장치에서 본떠온 것이다.

당시, 칼 또는 도끼로 목을 자르는 참수형이나, 마차 바퀴 또는 말이나 소에 묶어 죽이는 육시형, 목을 메는 교수형보다 죄인을 고통 없이 순간적으로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당시의 대중들이 ‘국가의 면도칼 Rasoir national’ 또는 ‘과부 Veuve’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이 고성능( ?) 기계를 공식적으로는 «루이제트 Louisette» 또는 «루이종 Louison»으로 불렀다고…..꽁꼬드 단두대

휴머니스트이며 의사로서 삼부회의에 평민대표로 참여하였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 혁명정부의 위원이기도 하였던 ‘기요땡 Guillotin’ 박사가 자신이 만든 단두대에서 죽었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판치는데, 1814년 3월 26일 파리의 자택에서 천수를 다 누리고 76세로 자연사한다.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던 단두대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것을 죽는 날까지 억울해하면서…..

단두대 기요틴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정부의 ‘헌법 의회’에서 총무를 맡은 ‘기요땡’ 박사의 자질에 늘 못마땅해하던 한 신문 기자가 비꼬는 투로 이 기계에 ‘기요띤느 Guillotine’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 것이란다. 오명을 뒤집어 쓴 박사는 사형수라도 고통 없는 죽음을 갖을 권리를 주장하며, 1789년 11월 28일, ‘정형외과 아카데미’의 사무총장이던 외과 의사 ‘앙뚜완 루이 Antoine Louis’가 고안한 기계를 사형수들의 목을 자르는데 이용하자며 ‘헌법 의회’에 선보인다.

단두대

« 죄인의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같은 종류의 위법행위는 같은 종류의 형벌로 처벌하여야 한다. Les délits du même genre seront punis par le même genre de peine, quels que soient le rang et l’état du coupable »는 생각으로…. 즉, 발명한 것이 아니고, 추천한 것!!!! 혁명정부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빨리 처형하기에 안성맞춤!!

1791년 6월 3일, ‘헌법 의회’는 « 모든 사형수들은 머리를 자를 것이다.  Tout condamné à mort aura la tête tranchée»라는 법령을 포고하고, ‘기요땡’ 박사와 ‘앙뚜완 루이 Antoine Louis’에게 이 기계를 빠른 시일 내에 개선할 것을 요구하였단다.

독일 기술자 ‘또비아스 슈미트 Tobias Schmidt’의 제안을 수용하여, 초승달 모양의 칼날을 마름모꼴로 바꾸면서 악명 높은 단두대의 모습이 완성되어, 개선된 최신식( ?) 기계는 ‘비세트르 Bicêtre’에서 양과 시체들을 이용하여 임상 실험을 거치고, 당시 최대의 절도범이던 ‘펠르띠에 Nicolas-Jacques Pelletier’가 1792년 4월 25일 첫 번째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행운( ?)을 갖는다.

영예로운 최초의 손님과 최신식 기계를 보기 위하여 모인 구경꾼들은 순식간에 손님( ?)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악인에게는 너무 과분한 처사라고 불평이 대단하였단다. ^_^

단두대

1793년부터 1794년 사이에 대 숙청 작업이 진행되면서 약 200,000 명의 목을 자르는데 지대한 공( ?)을 세운 단두대는 전체 높이 4.5 m, 칼날 높이 2.25 m, 무게 580 kg의 모습이다. 전국의 각 도청마다 단두대를 하나씩 설치하였고, 파리에는 죄인이 많았었는지 여러 곳에 설치하였단다. Place de Grève, Place du Carrousel, Place de la Concorde, Place de la Bastille, Place de la Nation, Champ de M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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