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가장 위엄 있는 12-15세기 중세 방어용 성곽으로 전체 2헥타르 (약 6천 평)에 달하는 면적을 갖는 푸제흐 성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재로 등재된 곳이다. 비록 성주가 살았던 건물은 폐허가 되었지만 3중의 성벽은 아주 잘 보존되어 있으며, 12개의 망루가 우뚝 솟은 모습에서 당시의 위용을 상상할 수 있다.

6세기경 독일 북부에 살던 앵글로 색슨족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오자, 원주민이던 캘트족이 대륙으로 흩어지면서 그 일부가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곳 브르따뉴 지방은 중세까지 프랑스 왕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지만 독립적인 브르따뉴 공작의 영지이었다. 브르따뉴 지방의 동쪽 끝,  국경지대에 위치한 푸제흐 요새!!!

푸제흐

브르따뉴 공작령

지리적으로 노르망디 지방, 썽트르 지방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푸제흐 요새는 경계를 맞대고 있는 노르망디 지방의 침략을 경계하기11세기에 최초의 요새가 건립되었지만, 앙주 지방과 아키텐느 지방, 노르망디 지방을 다스리는‘플랑타즈네 Plantagenêts’ 가문의 영국 왕 ‘헨리 2세’에 의하여 1166년 함락당하면서 파괴된 것을, ‘하울 Raoul II’ 가 1173년 더욱 견고한 요새로 탈바꿈 시킨 것이 현존하는 것이다.

‘하울 3세 Raoul III’는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을 보좌하여 7차 십자군 전쟁을 참전하여 1256년 사망하자, 무남독녀인 ‘잔느 Jeanne’가 ‘위그 12세 Hugues XII de Lusignan’과 결혼하여, 요새성벽과 성문 보강 공사를 하면서 방어용 ‘맬뤼진 Mélusine’ 탑과  ‘고블랭 Gobelins’ 탑을 세운다.

푸제흐

백년전쟁

성의 역사는 프랑스와 영국 간에 벌어졌던 ‘백년전쟁’ (1337-1453년)과 관련이 깊다. 1328년 프랑스의 왕 ‘샤흘르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영국으로 시집간 ‘샤흘르 4세’의 누이동생이 낳은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맞지만, 영국인에게 왕권을 주기 싫은 프랑스의 제후들이 ‘샤흘르 4세’의 사촌 ‘발루아 Valois’ 가문에서 자신들이 요리하기 쉬울듯한 ‘필리프 6세’를 왕위에 앉힌다. 여자는 왕권을 계승할 수 없다는 프랑크족의 ‘살리카 Salic’법을 이유로….

앙주 지방과 아키텐느 지방, 노르망디 지방을 다스리는‘플랑타즈네 Plantagenêts’ 가문의 영국 왕 ‘에드워드3세’는 불만이 많지만, 1328년 프랑스 내부의 영주들이 합의하여 뽑은 ‘필립 6세’에게 군신의 예를 갖춘다.

하지만, 아키텐느의 지방토호들이 프랑스 왕에게 중재를 요청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자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필립 6세’는 군신의 예를 포기한 신하의 봉토 즉, 아키텐느 지방을 몰수한다고 발표하여 백년전쟁(1337-1453년)이 시작된다.

푸제흐

영국군의 우세로 파리를 포함한 대부분 영토를 빼앗기고 프랑스 중부 이남 지역만을 간신히 보존하던 ‘샤흘르 7세’는1429년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랭스 대성당’에서 도유식을 거행하며 정식 왕위에 오른다. 이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한 영국군이 푸제흐에서도 물러나면서 다시금 프랑스의 브르따뉴 공작령으로 되돌아온다.

백년전쟁(1337-1453년) 중에 1445년 영국과 프랑스의 휴전협정으로 짧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는데 전쟁을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은, 1449년 공성전에서 사다리를 이용한 기습작전으로 이미 수 많은 전적을 올린 ‘프랑스와 François de Surienne’가 영국의 사주를 받아 600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1449년 3월 23일 야간 기습 공격하여 성을 찬탈하고 주민들을 모두 학살한다.

푸제르

당시에는, 브르따뉴 지방이 프랑스에게 군신의 예를 바치며 독립적 지위를 갖는 브르따뉴 공작 ‘프랑스와 1세François I’의 영지이었는데, 동생 ‘질Gilles de Bretagne’이 영국 왕의 사주로 반역을 꾀하자 체포하여 감옥에 넣는다. 모욕을 당했다고 여긴 영국 왕 ‘헨리 6세 Henri VI’는 ‘질’의 석방을 요구하는 회담이 진전이 없자, 브르따뉴 공작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여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고자 푸제흐 성을 점령한 것이다.

자신의 군대로만은 푸제흐 성을 되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브르따뉴 공작 ‘프랑스와 1세’는 프랑스의 왕 ‘샤흘르 7세 Charles VII’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다시금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어 백년전쟁의 막바지로 치닫는 상황이 전개된 곳이 바로 푸제흐 성 전투가 된다.

푸제흐

미친전쟁 Guerre folle

지루한 백년전쟁이 끝나고, 독립성을 강조하던 브르따뉴 공작 ‘프랑스와 2세François II’가 프랑스와 맞서 싸우는 ‘미친 전쟁 Guerre folle’(1485-1488 년)에서 푸제흐 성이 함락된 얼마 뒤, 1488년 7월 28일 ‘생 또뱅 뒤 꼬흐미에 Saint-Aubin-du-Cormier’에서 어린 동생 ‘샤흘르 8세’ 프랑스 왕을 섭정하던 누이 ‘안느 드 보쥬 Anne de Beaujeu’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게 완전히 패배함으로써 브르따뉴는 프랑스에 항복하고 만다.

이미 오스트리아의 ‘맥시밀리언 Maximilien’과 약혼하였던 유일한 상속녀 ‘안느 드 브르따뉴 Anne de Bretagne’가 프랑스의 왕 ‘샤흘르 8세’와 결혼하면서, 브르따뉴 지방이 영원히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는 사건 !

푸제흐

프랑스 편입 이후

푸제흐 성은 국경수비대 요새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방치되다가, 프랑스 왕 ‘앙리 2세 Henri II’가 자신의 애첩 ‘디안느 Diane de Poitiers’에게 선물로 주어 1547-1566년까지 소유하였다. 르와르 강변의 가장 아름다운 ‘쉬농소 Chenonceaux’ 성도 주었었고….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풍광이 아름다워, 1828년 ‘발자크 Honoré de Balzac’ 작가가 몇 주간 머물면서 작품에 몰두하여 1829년 ‘올빼미 당원들 Les chouans’을 집필한 곳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 Victor Hugo’의 작품 중에 프랑스 대혁명 상황을 묘사한 작품 ‘93 Quatre-vingt-Treize’ (1879) 속에서 푸제흐 성의  ‘맬뤼진 Mélusine’ 탑을 상세히 묘사하기도 하였다.

푸제흐

노트르담 성문 La porte Notre-Dame

유일하게 남은 ‘노트르담 성문 La porte Notre-Dame’은15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해자로 보호되며, 적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들어 올릴 수 있는 2중 도개교, 진입을 막는 쇠창살이 이 요새의 험난했던 시절을 이야기 한다. 프랑스 역사 문화재로 보호된다.

푸제르

푸제흐는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큰길이 만나는 교차로이다 보니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상업이 발달하였고, 중세시대에는 시냇물 주변으로 가죽세공업과 직물산업이 발달하였다.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앗간들이 들어서는데, 성 입구에 현대에 복원한 4개의 물레를 갖는 물레방앗간은 지금도 한 개를 운영하여 전기를 생산한다.

푸제흐 물래방아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고치지 않고, 무너진 곳은 그 상태로 500 년 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푸제흐 고성, 알고가자 중세시대로의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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