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뜨’ 언덕은 속세의 형식적인 삶을 거부하고 진정한 자유를 꿈꾸던 예술가들의 고향으로 낭만이 가득한 장소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지만, 역사적으로는 사람을 처형하는 장소로 이용되었거나 ‘갈로 로마’ 시대부터 신전을 모시던 신성한 산이었다고…. 알고가자, 몽마르뜨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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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 프랑스 초대 주교인 ‘생 드니 Saint Denis’ 신부님이 카돌릭을 전파하다가, 부 주교 두 명과 함께 순교한 장소이다. ‘생 드니’ 신부님이 잘린 자신의 목을 들고 6 킬로미터를 북쪽으로 올라가서 죽는데, 그 자리에는 ‘프랑스의 왕과 왕비들‘이 묻히는 곳으로, 세계 최초로 ‘고딕양식‘이 시작된 ‘ 생 드니 성당‘이 세워진다.
‘루이 14세’ 시절부터 ‘순교자의 산’ Mont (산)과 Martyre (순교자) 두 단어가 ‘Montmartre’ 로 변하였다. 우리 눈에는 해발 130 미터의 낮은 구릉이지만, 사방 100 킬로미터 안에 이보다 높은 산이 없는 프랑스인에게는 산으로 불리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순교당 Martyrium
‘생 드니’ 신부는 언덕을 오르기 전에 조그만 ‘Yvonne Le Tac’ 길의 11번지에서 목이 잘렸고, 9세기에 한 신부님에 의하여 전설이 알려지면서 순교당이 세워졌단다. 1096년에 성지 순례지로 지정 받았으며, ‘백년전쟁‘ 당시에 미치광이가 되어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샤를르 6세 Charles VI’ 가 종교의 힘으로 이성을 되찾고자 순례를 하였던 곳 이기도…..
1611년, 순교당 건물 지하에 납골당을 건설하는 과정에, 옛날의 본래 지하 묘소가 발견 되면서, 더더욱 순례지로 중요성을 인정 받게 되었다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의 성직자들은 매년 이곳까지 순례를 하고 있으며, 파리의 주교는 주교전을 거행하기에 앞서 이곳에서 ‘생 드니’ 신부의 순교를 추모하는 미사를 드린단다. 우리나라 단체 관광객은, ‘몽마르트르 언덕’ 의 낭만과 명성 때문에, 화가들의 광장, 성심 성당과 거리의 예술가들을 사진찍고 급히 내려간다. 좀 여유있는 단체(품격)는, 관광객에게 비싸게 받는 바가지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낭만을 이야기하고, 프랑스 문화를 느낀다고 생각하지만….사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제대로 된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여유도 없다.
성심 성당 Basilique du Sacre Coeur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성심 성당 Basilique du Sacre Coeur’ 은 프랑스에 거의 유일한 ‘비잔틴 양식‘의 건물이다.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나온 프러시아와 전쟁을 하여,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어 항복을 하지만, 파리 시민들이 항복하지 않고…… ‘파리꼬뮌 Paris Commune’!!!
171문의 대포를 끌고 ‘몽마르뜨르’를 점령하여 최후까지 항쟁하다가, 정부군의 진압으로 ‘빼르 라쉐즈‘ 공동묘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시민군들을 추모하고, 프랑스의 번영과 안녕을 염원하는 의미로, 성도 40 만 명이 보낸 성금으로 완공한 건축물이란다. 1876년 건축가인 ‘아바디 Abadie’가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을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축성식은 1919년에 갖는데, 프랑스 남부 지방의 ‘뻬리그 Perigueux’ 도시의 ‘생 프롱 Saint Front’ 성당을 모방하여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건설 목적이 호국성격을 띄고 있어서, 정면에 두개의 청동 동상은 프랑스에 카돌릭을 장려하고 신실한 신자였던 ‘생 루이 Saint Louis(루이 9세)’의 동상과, ‘백년 전쟁‘ 당시에 ‘샤를르 7세’를 도와 영국군과 싸웠던 ‘쟌 다르크’의 동상이다. 지상의 권세를 가진 ‘생 루이’ 왕은 칼날이 땅을 향하여 있고, 하늘의 권세를 받았던 ‘쟌 다르크’ 의 칼날은 하늘을 향하여 있다. 내부에는, 길 잃은 어린양들을 두 팔을 벌려서 맞이하는 예수님의 천정화가 특이하다.
수녀원 Abbaye de Montmartre
1133년 ‘루이 6세’ 때에 건설 된 수녀원은 ‘몽마르뜨르’ 전체를 차지하고 야채 밭과 포도밭을 갖고 있으며, 막강한 교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단다. ‘루이 14세’ 때 권리가 축소되고, ‘프랑스 대혁명‘ 때 수녀 원장이 처형되면서 국가로 귀속되었다고….. 지금은 조그마한 돌 벽돌 집으로 수녀원의 명맥을 잇고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베드로 성당’은 갈로 로마 시대에 건설된 신전 기둥을 사용하여 재건축 되었고, ‘파리 꼬뮌’ 시절에는 봉제 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떼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
화가들이 모이는 ‘떼르뜨르 Tertre’ 광장은 ‘루이 14세’ 때만 하더라도 교수형을 처하는 장소 였지만, 현재는 수많은 식당과 무명 화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명소로 탈바꿈하였다. 초상화는 60 달러 정도 하는데, 동양인의 골격구조를 잘 잡아내지 못하고, 나이보다 젊게 그려 주기 때문에, 자기 얼굴이 아니라고 종종 시비가 붙는다.^_^ 정찰제가 아니라서 가격 흥정이 가능하지만, 깎는 만큼 선이 빠지니까 주의 !!
광장 뒤편에는, 초 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관이 있으며, 몽마르트르 미술관에서는 역사와 유래를 배우고,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당시에 가난하고 무명이던 수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서 논쟁을 하던 ‘라뺑 아질 Au Lapin Agile’ 은 후라이팬에서 튀어 나오는 토끼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저녁에만 여는 원맨쇼 식당? 카바레? 바? 어쨌든 예약 필요!!! 강추!!!
몽마르트르 풍차 Moulin
예전에는 23개의 풍차가 있던 곳 이라던데….. 산업이 발달하면서, 바람을 이용한 풍차를 증기기관이 대체하게 된단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르느와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옛 모습을 아직도 그대로 간직한 풍차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지만……. 그 장소는 현재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예술가들 Les artistes
1860 년경에 파리 시로 행정구역이 편입되었지만, 성 밖으로 취급되어서 술에 부과되는 주세가 없었다. 즉, 면세!!! 많은 선술집들이 들어서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가난한 예술가들이 즐겨 찾게 되면서, 문화 공간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인상주의‘의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르느와르’, ‘반 고호’, 고갱’, 세잔느’, ‘조르주 쇠라’, 입체주의의 ‘피카소’, ‘조르쥬 브라크’를 들 수 있다. 소설가인 ‘에밀 졸라’, 음악가인 ‘쇼팽’ 등 수 많은 예술가들의 활동지였다. 1870년 이 후에 프러시아 군대가 주둔한 곳이 몽마르뜨르 언덕이어서, 공창 지대인 ‘삐갈거리 Pigalle’ 가 형성 된다. 최초의 카바레인 ‘ 물랭 루즈 Moulin Rouge‘는 빨간색의 풍차라는 뜻으로, 1889년 문을 열고 지금까지 프렌치 캉캉으로 유명한 카바레이다. 고급 콜걸!!
어릴 적 낙마 사고로 발육이 정지된 상태에서 절망하던 ‘뚤루즈 로트랙 Toulouse Lautrec’ 이, 몽마르트르의 선술집과 카바레에서 방탕과 화려함의 뒷면을 살아있는 필치로 남긴 작품들에서 당시의 무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업을 위하여 매일 술집에 간다” 라고…. 술집 여자, 거리의 창녀들의 친구가 되어서 스스럼없이 그네들의 생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여 묘사하게 된다. ‘물랭 루즈’의 댄서들을 그린 걸작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유명한 화가로 기억되지는 않았지만,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들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쉬잔 발라동 Suzanne Valadon’ 과 그녀의 아들인 ‘모리스 위트리오 Maurice Utrillo’ 이다. 1865년 리모쥬 근처의 마을에서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쉬잔 발라동’은 서커스단의 곡예사로서 자유분방한 여인이었지만, 사고로 서커스를 그만두고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세탁소의 배달원이 되어 화가들의 집을 드나들면서 ‘르느와르’나 ‘뚤루즈 로트랙’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노르망디 지방‘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옹플뢰르 Honfleur‘ 태생인 ‘에릭 사티 Erik Satie’ 피아노 연주자가 평생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이다.
현재는 수 많은 예술가들이 관광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흘러간 옛 노래를 펀칭된 나무 악보로 연주되는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활기가 생길 것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몽마르트르’에서는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계단에 앉아서 음악도 들어보고, 연극하는 것도 구경하고, 참새에게 먹이도 주면서 휴식을 취하면 좋다. 동전을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동전을 팁으로 주는 것은 잊지 말자! 단, 소매치기가 극성이니 조심!
이국인들의 사이에서 골목을 거닐면서 정취를 느껴보고, 노천 카페에서 지나가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옛 화가들의 숨결을 느껴보자! 또한, 불법 상인들이 보자기에 대각선으로 끈을 묶어 놓고 있다가 경찰이 오면 손가락을 걸고 도망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국적불명의 이상한 물건들을 구입하지는 말 것!!!!!
세탁선 Le Bateau Lavoir
무명 시절에 빵 살 돈도 없는 가난한 화가들이 방값이 싼 몽마르트르 언덕에 정착을 하면서 현재의 ‘떼르트르 Place du Tertre’ 광장이 화가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에밀 구도 광장 La Place Emile Goudeau’ 에 위치한 ‘세탁선 Le Bateau Lavoir’ 는 버려진 선술집을 개조하여 가난한 화가들이 정착하여 작업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입체파의 주요 인물인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는 ‘뚤루즈 로트랙’을 찬양하며 1904년에 ‘세탁선 Le Bateau Lavoir’ 이라는 예술가들의 연립주택 형식의 건물에 정착하는데…
빈대와 바퀴벌레가 득실거리고 수도 꼭지가 하나밖에 없는 열악한 조건의 건물, 빈곤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곳에서, 피카소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운명적으로 만난 곳이다.
절친한 친구인 ‘카사헤마스’ 가 실연당하여 1901년에 자살함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우울함을 청색 빛으로 표현하던 ‘청색 시대’의 작품 세계에서, 운명의 연인인 ‘올리비에’와의 사랑 덕분에, ‘장미빛 시대’로 피카소의 작품 세계가 넘어가고, 입체파의 시작을 알리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이 시절에 완성하게 된 곳!!!
제 1차 세계대전 까지만 해도 많은 화가들이 작업을 하던 곳으로, 현대 미술의 산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곳을 거쳐간 화가들 중에는 ‘큐비스트 (입체파)’ 의 양대 산맥인 ‘조르쥬 브라크’ 는 너무 가난한 나머지 침대가 하나 놓인 방에서 낮과 밤에 서로 교대로 침대를 이용하였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