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

Révolution française 

세금과 폭정에 허덕이던 가난한 민중이 흘린 피로, 사치와 낭비의 화신인 프랑스 왕정을 무너트리고, 자유를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 대혁명!!!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진실을 알고가자!!!!

 

프랑스 대혁명 사회적 배경

‘루이 14세’ 시대 절정에 달하였던 ‘부르봉 왕조’의 권위는 ‘루이 15세’와 ‘루이 16세’에 이르러 점차 약화된 반면, 산업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한다.

‘볼테르 Voltaire’, ‘몽테스키외 Montesquieu’, ‘쟝 작크 루소 Rousseau’에 의하여 확산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평등주의가 확산되면서,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층에 대한 평민 계층의 비판 의식이 발달하면서 혁명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한다. ‘쟝 작크 루소’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그의 무덤이 있는 ‘에흐므농빌 Ermenonville’의 정원은 당시의 사회 정신과 철학을 표현하고 있어서 꼭 가볼만하다.

 

프랑스 대혁명 초기와 제 1공화국

무조건적인 미국의 독립 전쟁 원조로 인한 국가의 재정이 바닥이 나자, 1789년 5월5일에 ‘루이 16세’가 재정난 해결을 위하여 ‘삼부회 Etats Généraux’를 소집하지만, 평민들의 대표로 참석한 ‘부르주아 Bourgeois’들을 제외시키고 새로운 세금을 결정한다. 귀족이면서도 평민들 편에 섰던 ‘미라보 Mirabeau’의 주관으로 평민 대표들이 철야 농성을 하면서, 특권을 폐지하고 평등 과세를 주장한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6월17일 평민 대표들만으로 구성된 ‘국민 의회’를 선포하고, 7월9일 ‘제헌 의회’로 개칭하여 헌법 제정을 추진한다.

혁명군에 의하여 상징적인 정치범 수용소 ‘바스티유 Bastille 감옥’이 7월 14일에 함락되면서 드디어 시민들이 무장을 갖추게 되고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며, 7월 16일 ‘파리 꼬뮌 Commune de Paris’이 수립되고, 8월 26일에 ‘인권 선언문’이 선포된다. 1792년 ‘국민 공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자유, 평등, 박애”를 이념으로 하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단두대 기요틴’에서 공개 처형한다.

공화국 초기에는 공화파 중에서 ‘계몽 부르주아’ 중심의 혁명을 지향하는 온건 ‘지롱드당 Girondins’이 우세하였지만, 프랑스 대혁명 1793년 초부터 ‘당통 Danton’, ‘마라 Marat’,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등 ‘산악당’을 주축으로 하는 급진 ‘자코벵당 Jacobins’이 ‘지롱드당’을 축출하고 ‘공안 위원회 Comité de Salut Public’이라는 일종의 혁명 재판소를 구성하여 반혁명 혐의자와 귀족,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감행하면서 공포정치를 한다.

’마라 Marat’는 1793년 7월 14일에 암살되고, ‘당통 Danton’은 1794년 4월 4일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에 의하여 처형되고, ‘로베스피에르’가 독재권을 장악하고 지나친 공포정치를 하자 이에 반대하는 국민 공회가 1794년7월 그를 처단하고, 1795년부터 5명의 집정관이 모든 권력을 갖는 ‘집정관 정부 La Directoire’ 체제로 변모하지만, 스스로 분열한다.

 

프랑스 대혁명 종식

1795년 9월 23일 수립된 ‘5인 집정관 체제’는 구심점이 없어서 약체화 되고, 재정난에 부딪치게 되자 왕당파와 반혁명 세력의 도전이 강화되는 분위기를 틈타서 ‘나폴레옹 Napoléon’이 1799년 12월 13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다. ‘나폴레옹’은 형식상 ‘3인의 집정관’으로 구성되는 ‘집정 체제 Consulat’를 수립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제1 집정관인 ‘나폴레옹’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1804년 5월 18일 황제가 되면서 대혁명은 끝난다.

1880년부터 7월 14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매년 군사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로 혁명을 통하여 자유를 획득한 것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