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 동상 (오귀스트 로댕)

발자크 동상 (오귀스트 로댕)

La Status de Balzac 

“인물의 깊숙한 내면을 엿 보고, 그 사람의 생각을 상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술은 결국 신비한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J’ai compris qu’il fallait faire entrevoir le milieu où il vit et faire imaginer comme un halo d’idées qui expliquent ce personnage. L’art ainsi se prolonge en mistérieuses ondes” – 로댕 Auguste Rodin

“창작 자체가 ‘발자크’의 창작에 대한 자존심, 그의 긍지와 열광을 보여 주는 형상을 만들어 준다. C’était la création elle-même qui se servait de la forme de Balzac pour apparaître; l’orgueil de la création, sa fierté, son vertige et son ivresse” – 릴케 R. M. Rilke

관찰자를 인물의 깊숙한 내부로 안내하는 작품!!! 육중한 몸집이 두 발은 약간 벌린 채 팔짱을 낀, 단순하지만 강력한 자세로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수도복을 입고 몽상에 잠긴 듯이 서 있는 발자크. 너무 비대한 머리에, 멀리 시선을 두고 있는 소설가 ‘발자크’의 모습은 외모를 보여주기 보다는 인물의 창조력과 소설가로서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프랑스 문인협회 Société des gens de lettres’의 회장인 ‘에밀 졸라’는 이 모임을 창설한 ‘발자크’ 동상 제작을 1891년 ‘로댕’에게 의뢰하였고, ‘로댕’은 파리의 ‘빨레 로얄 Palais Royale’ 극장에 세워질 높이 3 미터 정도의 동상을 1893년 5월 까지 인도한다는 조건으로 1만 프랑을 받는다.

모델이 없는 작업은 불가능하며,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는 착상조차 어렵다고 회고한 ‘로댕’은 ‘발자크’ 같은 인물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갖가지 자료를 수집한단다. ‘발자크’의 육체와 개성을 파악하는데는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생산적인 힘으로 시대를 창조하고 수 많은 운명을 창조한 소설가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그의 작품을 탐독하며 인물의 정신 세계에 빠져든단다. 소설가의 고향인 ‘앙쥬 Anjou’를 찾아가서 우연히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발견하여 스케치하고, ‘발자크’의 단골 양복점에서 그의 칫수대로 코트를 주문 제작하기도 하면서 ‘발자크’의 전체적인 골격을 파악하고, 누드 점토상으로 수도복을 입은 ‘발자크’, 잠옷을 입은 ‘발자크’, 머리가없는 ‘발자크’를 만들어 보았다고…..

형태에서 형태가 나오듯이 ‘로댕’의 구상은 서서히 무르익어 가지만 마감 날짜를 맞추지 못하고,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할 수 없는 ‘문인협회’는 1894년 10월까지 조각상을 인도하라고 요구한다.

작품의 반향과 시련

1898년 ‘살롱전’에 출품된 ‘발자크’의 석고 조각은 심한 혹평을 받았다. “이상한 돌 덩어리나 수 천년 전의 선돌 또는 선사 시대에 화산이 폭발하면서 우연히 생긴 인간 형상의 화산석 보다도 형편없는 조각. Moins une statue qu’une sorte d’étrange monolithe, un menhir millénaire, un de ces rochers où le caprice des explosions volcaniques de la préhistoire figea par hasard un visage humain”.

더구나 프랑스 ‘문인협회’는 이 작품을 ‘발자크’의 인물상으로 볼 수 없다며, 대금 1만 프랑을 돌려 달라며 ‘쟝 알렉상드르 빨귀에흐 Jean Alexandre Falguière’에게 새로이 주문한단다. ‘로댕’의 친구들과 후원자들이 항의 서한을 보내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이었던 ‘드레퓌스 Dreyfus’ 사건과 맞물려서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번져갈 양상을 보였었단다.

결국, ‘로댕’ 스스로 자신의 작품은 자신이 소유한다며 쟁점을 피해가기는 하였지만, 더 이상 동상 건립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로댕’은 사랑하는 수석 제자이며 정부였던 ‘끌로델 까미유’와 결별하는 문제가 겹쳐서 힘든 기간을 보낸다.

석고 조각은 ‘뫼동 Meudon’의 작업실로 옮겨지고, 사진 작가인 ‘스태청 Steichen’이 밤에 찍은 사진이 여론을 형성하여, 청동 주물로 제작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당시의 사회적 반응을 우려한 로댕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40년이 지난 1939년 7월 2일 ‘하스빠이 Raspail’ 거리와 ‘몽빠르나쓰 Monparnasse’ 거리의 교차로에 드디어 ‘발자크’의 첫 청동 조각이 세워진다. 현재는 비둘기 똥 때문에 몸살 중!!!

‘뫼동’의 로댕 작업실(현재 박물관) 앞에 자리를 잡고, 계곡을 내려다 보며 망상에 젖는 ‘발자크’를 세우기 위하여 두 번째 청동 주물을 만들지만,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뫼동’이 아닌 파리 ‘로댕 박물관’의 정원에 세워진 조각이 관람자들을 맞이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