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발견된 ‘색유리 Vitraux’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고분에서 발견된 유리제품들이다. 이것들은 지금의 색유리와는 다르지만 ‘스테인드 글라스’ 미술양식을 성립시키는 근원적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색유리 기술은 에게해를 거쳐 그리스 로마로 전달되어 로마 초기 교회 건축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오랜 종교 탄압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일신을 섬기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함으로 대규모 교회 건축물이 신축되면서, 교회 건축의 내부 벽면 장식으로 색유리를 이용하게 되었다.
1. 로마시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벽면 장식 법으로는 텃세라(tessera)기법이 있었는데, 이는 석회석 반죽을 하여 그것을 착색시켜 사용하거나 색깔 있는 작은 돌, 대리석 조각으로 모자이크를 하여 벽면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색유리 조각이 유리 모자이크 형태로 벽면에 부착되어 광채를 내는 보석과 유사한 효과를 내었다고….
이는 유리 텟세라로 불리우며 벽면에 부착된 유리 텟세라는 ‘비잔틴‘, ‘로마네스크 시대‘를 거쳐오면서 건축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차차 창문에 응용되었단다. 색유리 창으로 직접 빛이 투과되어 자연스럽게 시간과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빛과 색채의 예술로 변모하게 된 것이라고….
이처럼 스테인드 글라스의 기원은 로마 시대 초기의 교회 건물내부에 유리 텟세라로 벽면을 장식하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그리스도 교회와 교회 건축의 내부 장식과 관련하여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11세기경 로마네스크 건축 창에 도입되고 ‘고딕 시대‘에 이르러 고딕 건축양식에 응용되어 변화, 발전하는 등 중세 시대까지 교회와 교회건축과 계속해서 관련되어 발전하게 된다.
2. 중세 시대(11세기 후반-14세기말)
중세 유럽 미술은 종교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독교 정신과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한 미술이었다. 이러한 중세 미술은 특히 고딕 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고딕 성당’의 건축과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말 할수 있다. 이 시대의 미술은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미술양식을 보여주며 그 장식 미술이 집중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교회 건축과 미술은 교회 지도층, 성직자 등과 같은 주문자의 지시 아래 수도자, 예술가들 그리고 돌, 유리, 금속, 나무, 직물 등을 잘 다루는 장인들이 함께 창조했다고….
즉 교회 건축과 미술 작품은 종합적인 미술 활동과 공동체의 움직임 속에 세워졌다.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는 수도원의 공동 작업장에서 제작되고, 이후 길드 조직(guilds)의해 제작된단다.
수도원은 베네딕트 성자 (St. benedict, 480-550)가 창시하였는데, 이 당시에는 지식과 예술의 중심지로 많은 공예품과 미술품, 그리고 예술 작품들을 낳는 중심이 된단다. 그 곳은 훌륭한 고대 문화 전통을 보존하고 있었고, 북부와 동부에서 유럽으로 이주하는 민족들로부터 새로운 양식들을 채용하고 그것을 창의적으로 소화했다고… 또한 그 당시 성직자들은 신플라톤주의에서 얻은 새 통찰력에서 새로운 미적 형태를 갖춘 교회를 만들도록 위임받게 되는 환경이었다.
중세 빛에 대한 전형적 관념은 “빛은 만물의 창조 원리이며 천상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것으로 지상의 모든 유기적 성장의 원인이며 질서와 가치의 원리임으로 빛나는 대상을 볼 때의 기쁨에 대하여 존재론적 존엄성을 직관하게 된다.” 라는 스콜라 철학자인 Rebert Grosseteste(1170∼1253)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세 그리스도 교회에서의 빛은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천상 세계,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런 한 신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고딕 건축양식에서 빛의 의미는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창으로써 빛을 유입하여 환상적 색광을 내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중세의 시대적 정신과 융합된 양식이었다고…..
스테인드 글라스는 9C – 11C 경 ‘로마네스크’ 시대의 건축 창에 도입되고 고딕시대에 가톨릭 정신과 이를 구현한 ‘고딕 건축양식‘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변화,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신과 문화, 예술을 배경으로 고딕 양식과 관련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발전 할 수 있었단다. 중세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건축양식과 관련하여 스테인드 글라스의 초기에 해당하는 로마네스크 시대와 전성기에 해당하는 고딕 시대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가. 로마네스크 시대(11세기 후반∼12세기 중반)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은 ‘로마와 같은‘ 이라는 뜻으로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유럽의 건물에서 두꺼운 벽과 아치가 있는 고대 로마의 석조 건축과 닮았음을 가리키는 건축 용어로, 로마가 AD 475년이래 12세기말까지 이르는 사이에 로마 예술을 기초로 하여 유럽 전 지역까지 형성된 건축 양식이다.
이는 라틴 십자가를 평면으로 하고 두꺼운 벽면과 높은 탑을 특징으로 한다. 로마네스크 교회는 단순히 예배 장소로 사용되지 않고 학교, 시민관, 박물관 등으로 사용된다. 즉, 건축 공간의 빛이 측량 위의 계량을 통해 충분히 빛을 비춰 주어야만 했다. 따라서, 창은 아치형으로 만들어졌고 9세기경부터 개구부에 유리가 도입되어 최소의 면적으로 색유리가 사용된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시기에 로마네스크 건축의 창에 도입되었고 녹색, 적색, 백색, 금색의 사용을 볼 수 있으나, 창 면적의 최소화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창보다 벽체의 여백이 많아 벽에 성화와 성상의 장식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초기에는 교회 건축 창에 전반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다는데….. 그 이유는 ‘로마네스크‘ 건축양식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반원 아치와 버팀 기둥을 기본구조로 하는 원형 또는 교차궁륭의 구조와 이에 따른 두꺼운 벽과 좁은 간격으로 촘촘히 세워진 석주로, 구조상 창을 크게 할 수 없었기에 적극적으로 활용 될 수 없었단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1050-107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알사스 지방’의 ‘위센버그 Wissenbourg’의 수도원에 있는「예수의 얼굴」이다. 표현 양식은 단순하게 양식화되어 있는데, 당시 유리 제조 방식이 규사에 목탄을 섞어 만드는 초보적 단계를 보여준다. 즉 유리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예수 얼굴을 트레스 방법으로 제작했다고……
- 초기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은 11세기경 독일 ‘아우구스 부르그 Augusburg’ 대성당에 다섯 명의 성인이 그려진「예언자 상」이며 이는 우리가 말하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모자이크 형식으로 색유리 조각을 납줄로 조합하고 페인팅한 양식이란다.
- 프랑스의 ‘르망 Lemans’ 대성당의 「승천」과 ‘쁘와티에 Poitiers’ 대성당의 「사형」을 들 수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 초기 작품들에서 본래 스테인드 글라스가 단순한 유리 모자이크가 아닌 그 위에 페인팅한 글라스 페인팅이라는 점과 색유리와 납줄을 사용한 것으로 이미 초기에 제작 기술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오늘날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많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 고딕 시대(12세기 중반∼14세기말)
‘고딕시대‘에와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건축양식과 함께 장식적이면서 화려해 지며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또한 고딕 건축양식과 융합되고 신앙 표현의 절정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더욱 발전한다.
장식적인 체계속에 성서나 교리를 주제로 이야기식의 도식을 보여주며, 또한 상징적이며 화려한 장식형태를 보여준다. 원색 색유리의 개발로 색채의 강렬함과 화려함, 그리고 고딕건축과 조화를 이루어 최고의 걸작품이 만들어 진다고…..
고딕 건축은 그 당시의 중세철학, 즉 기독교 사상을 건축을 통해 완벽히 구현했다. 고딕 건축양식은 ‘생 드니 성당‘의 쉬제르 수도원장에 의해 창안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 나아갔다. 고딕시대는 교황권이 높아지고, 교회의 정치적 사회적 상승과 함께, 교회의 대규모적인 전개가 이루어 진다. 또한 고딕 미술의 3대 미적 관점인 신의 영광, 위대함, 조화로움을 성당 건축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따라서 건축양식은, 교회당 공간을 가능한 높게 강조하게 되어 수직적인 기둥을 기본 구조로 이루어지고 벽체는 간소하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시키는 창이 많이 생기게 된다. 구체적으로 고딕 건축양식은 늑골궁륭과 첨두형 아치, 버팀기둥을 특징으로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처럼 버팀을 벽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어 많은 창과 큰 창문들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크고 많은 창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고딕 양식‘의 확립은 ‘쉬제르 Suger’ (1081-1151) 수도원장의 공로가 컸다. 그는 ‘생 드니(St. Denis) 성당‘을 고딕양식으로 최대한의 밝은 창문, 최소한의 벽의 구조로 스테인드 글라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생 드니 성당은 우아한 늑골궁륭, 첨두형 아치의 골격구조로 된 새로운 고딕양식으로 보여주며, 스테인드 글라스는 화려함으로 더욱 매력이 고양되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중세 기독교 정신을 구현한 고딕양식이 확립된 것이다.
‘생 드니 성당‘ 서쪽 파사드의 중앙현관 청동문 위에 쉬제르가 새겨 놓은 글 “어리석은 마음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 진리에 이르고 또 진리의 빛을 봄으로써 이전의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라는 글이 있는데….. 조각, 금속 공예품, 보석, 귀금속, 색유리로된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천상 세계를 명상하고, 신자들을 이러한 신비한 영적 움직임(analogical movement)을 이끌려고 하는 그의 신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중세의 물질 세계와 정신세계의 조화를 볼 수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에 통해 교회에 들어오는 색광은 중세 기독교 사상과 관련된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구약성서의 빛은 선, 지혜, 힘, 권력, 신의 보호로 상징된다. 반면 신약성서에서 빛은 그리스도 그 자체, 영적인 깨달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신플라톤주의 영향으로 빛의 형이상학적 완성이 이루어 지고, 신은 빛 뿐만 아니라, 조화의 미를 갖는 것이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처럼 중세 철학자 또는 생각하는 이들에게 신의 본질을 암시해 주었다. 또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교회 건축 공간에서 빛을 통해 화려한 광채로 신비한 미적 공간을 마련하고, 성서적 주제, 교리적 내용을 담아 신자들에게 시각적으로 교리 역할을 하였고 교의와 그 당시 생활상 등을 상징적으로, 장식적으로 표현하였고 또한 종교적 정치적 구조에 대한 민주적 성향의 교회 의사를 반영하기도 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며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13세기에 건립된 프랑스의 ‘샤르트르 Chartres’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며 그 원형이 잘 간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6개의 창으로 이루어져 보석 같은 빛의 강렬함과 마치 천상에 있는 듯한 다채로운 색광이 성당 내를 채우고 있으며 색채 조화는 짙은 푸른색과 밝은 붉은 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성당 내진의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창의 우리의 성모(노트르담 드 라 벨 베르에르)]와 [이새의 나무창]에서 알수 있듯이 성모 마리아와 성서의 내용 그리고 그 당시 생활상 등의 다양한 내용을 상징적이며 장식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형태와 구성에 있어서 대칭성과 인물의 정면성을 띠며 중심인물을 크게 하였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부르쥬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양식에 영향을 주고, 13세기 중엽에 건립된 성 루이스 양식을 창조한 ‘생트 샤펠 Sainte-Chapelle‘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의 장미창에 영향을 주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창에서는 화려한 색채, 형태보다는 빛과 디자인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14세기에는 은착색법을 창안해서 담황색으로부터 점차 짙은 여러 가지 황색계의 음영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납틀의 사용량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14세기 중엽에 개발된 ‘프레쉬 글라스’ 기법은 색채의 범위를 보다 폭넓게 하기 위해 이중으로 색유리를 덮는 기법으로 유리가 녹아 있을 동안 하나의 색에 다른 색을 덮어서 제3의 색 또는 보다 선명한 색을 만들어 내는 기법이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제조기법은 영국, 프랑스, 독일등에서 서로 상호 교류하여 발전했다.
고딕 건축에서 스테인드 글라스의 전체 형태를 결정하는 창의 형태는 지역적 특성과 시대에 따라 고유한 형식이 채택되었고 스테인드 글라스를 더욱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또한 건축공간과 유기적 조화 통일감을 이끌어 낸다. 이런 예로 프랑스의 화엽형 양식, 영국의 장식형, 독일의 존다고식을 들 수 있다.
창의 형태는 12세기 원형에서 13세기의 엽식형, 14∼15세기의 수직식, 15세기에는 직선적 수직식 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려하고 복잡해지고 격자식의 창살 형식으로 창의성이 떨어 지게 되었다. 장식형 스테인드 글라스는 13세기말에서 14세기말에 걸쳐 전개된 양식이며, 요크민스터 성당을 그 대표적 예로 들 수있다. 여기서 창의 형태가 나뭇잎 모양의 유선으로 이루어져 장식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14세기말에는 장식형의 반동으로 수직형 스테인드 글라스가 생겼다. 이는 장식형에 비해 창이 넓고 깊어 외부로부터 많은 채광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보다 정교한 묘사로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고딕 시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자연 대상물인 나뭇잎, 꽃 모양과 성서 인물, 그리고 그 당시 생활상들을 우화적, 상징적, 장식적인 형태로 되어있다. 또한 조화로운 색채 배열을 보이면서 청색과 붉은 색계열의 대조 등 색채가 원색적이고 강렬하여 그 화려함과 신비감을 더하여 스테인드 글라스의 예술적 극치를 보여준다.
장식적인 창의 형태속에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건축과 조화를 이루어 더욱 더 큰감동을 일으킨다. 고딕 시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당 건축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미적 효과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정신의 표현으로 고딕 건축양식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3.르네상스 시대와 쇠퇴기(14말∼19C말)
‘르네상스 시기‘는 15세기, 16세기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향기로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정신은 계몽주의 운동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발생하게 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 시대적 정신으로 나타났다. 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고와 가치로 복귀하고자 했다. 즉 인간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자 척도로 그리고 인본주의적 사고 경향으로 문화와 가치를 새롭게 부여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 정신의 변화 속에 경제와 관련하여 지배 계층과 문화 예술의 향유 계층이 달라졌다. 중세에서는 교회 지도자, 왕족, 귀족, 교회가 주도적이었지만, 이 시기에서는 자본가 은행가들이 새로운 경제 계층으로 등장하여 문화와 예술의 향유, 후원 계층으로 점차 확대되고, 변화되었다.
예술의 내용과 양식에 있어서도 변화가 생겨 종교적인 내용과 양식에서, 세속적인 내용과 양식으로 변화한다. 또한 예술품은 교회 건축에서 제작 소유하는 대중적 예술품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제작, 소유하는 개인적인 예술품이 되었다.
따라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고딕 시대의 건축양식의 여명으로 15, 16세기 활발히 제작되기는 하지만 점차 과도기를 맞게 되고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점점 쇠퇴하게 된다. 쇠퇴된 이유로는 건축양식의 변화, 유화와 벽화의 발달과 15세기 플랑드르 사실주의 회화의 영향, 에나멜 색소의 남용,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이후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건축양식의 변화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변하여 중앙 축선에 의한 대칭적 구도의 그리스 십자가의 평면 형태로 바뀌었다. 첨탑은 하늘과 신을 상징하는 부드러운 돔으로 대체되었고 창은 벽의 구멍으로 취급하여 율동의 변화로만 생각하였다. 또한 채광층은 없어지고 높은 창을 통해 빛이 유입되었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기의 건축은 고딕 건축과는 달리 거대한 창을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발달하기 힘들었고 쇠퇴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유화와 벽화의 발달로 교회건축 공간에는 유화와 벽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많은 작업 시간과 고가의 재료비를 요구하는 스테인드 글라스 보다 유화와 벽화가 더 간편하였다. 그리고 15세기 플랑드르 사실주의 회화의 영향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사실주의적인 유화나 벽화의 모방형태로 변하였다.
즉 패널 형식으로 유리판이 캔바스(canvas)로 그 위에 사실적인 회화표현을 하였으며, 에나멜 색소의 혼용으로 색은 엷고 강렬하지 못하며 빛에 의해 색이 바래지는 등 색유리의 특성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교회 건축물의 창은 점차 세속적인 성격이 짙어지고 고가인 스테인드 글라스는 가정내 건축에서 장식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즘의 사고가 대두되어 교회 건축물의 창과 예술적인 귀중품들이 우상 숭배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성서 이야기 대신 세속적인 주제가 애호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교회 건축물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파괴되어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고…..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프랑스 ‘에브뢰 Évreux’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자료 :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황선아 석사학위 논문
“한국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양식변천 연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