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투어 매년, 프랑스 서부해안 ‘노르망디 지역‘에서는 16개국 20여명의 정상들이 모여,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장식한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작전’ 기념식이 성대하게 치루어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프랑스와 독일의 두 정상이 한 단상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역사의 아이러니!!! 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는 바로 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데,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력과 작전 및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자. 1944년 6월6일 연합군에 의해 실시되었던 사상 최대 규모의 군부대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연안에 상륙하여, 독일군에 대한 전면적인 반격을 시작하는데……
연합군의 작전계획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된 전략회담에서, 유럽대륙에 연합군을 상륙시키려는 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1943년 5월의 제3차 워싱턴 회담에서 ‘아이젠하워 Eisenhower’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 원정군 최고사령부는 상륙 작전 예정지를 북부 프랑스 ‘노르망디‘로 정한다. 워낙 가파른 절벽과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 때문에 이쪽으로는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독일군의 수비 상태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이었다고…..
작전명 ‘오버로드 Overlord’에는 12개 기갑사단을 포함한 39개 사단, 287만의 병력과 항공기 1만2천대, 함정 5천3백여 척 등이 준비되었다고…..
`오버로드’작전이 워낙 방대한 양의 물자와 인력이 투입되어 독일군이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기 때문에, 연합군은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 ‘빠 드 깔레 Pas de Calais’ 지역이 상륙지점이 될 것처럼, 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계속 위장 무전송신, 근해 해군 기동연습 등을 통해 적을 기만하였으며,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가상 부대와 모형 전차 등을 해협 건너편에 집중 배치하고, 거짓 정보도 흘리고……
실제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이후에도 독일군은 이것을 ‘칼레 Calais’ 지역에 주둔한 독일군의 주병력을 ‘노르망디’로 유인하려는 연합군의 양동작전인 것으로 생각하고 독일군은 제15군단을 계속 ‘칼레’ 지역에 묶어두었단다. 완전한 첩보, 위장, 정보전의 승리!!!
독일군의 방어 계획
독일군은 1944년 5월경에 58-59개에 이르는 사단을 서부전선에 배치하였는데, 보병사단이 17개, 기갑사단이 9개, 기갑척탄병사단이 1개, 공수사단 및 공군야전사 5개 사단만 정예부대이고…..
전체 사단의 40%에 해당되는 나머지 25개 사단은 평균 연령이 매우 높았으며, 중화기와 탄약, 유류 등의 장비 및 보급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단다. 또한, 강제 징집된 인원과 포로 가운데 의용군으로 자원한 인원이 병력의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대 결속력이 매우 약하였다.
비록, 사단 숫자는 60개에 가까웠지만, 제공권을 연합군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한 불리한 상황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해야 할 핵심 주력부대인 9개 기갑사단과 1개 기갑척탄병 사단의 배치를 두고, 각 지휘관과 참모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다.
독일군 서부전선 사령관인 ‘본 룬트슈테트 Von Rundstedt’원수와 서부 기갑 집단사령관 ‘쉬버펜부르크 Schweppenburg’ 기갑대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기갑부대를 작전 예비로 편성해 내륙 지역에 배치했다가, 연합군의 상륙이 확실해지면 공세로 전환해 기동전으로 연합군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사막의 여우 ‘롬멜 Rommel’ 장군은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경험상 예비대가 기동하는 과정에서 함포와 항공기의 집중공격에 의해 많은 손실을 입을 것이며, 이동 시간이 지체되어 적시에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지 못할 것이기에 기갑부대를 해안을 따라 일렬로 배치해서 연합군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마련하기 전에 격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총통 ‘히틀러 Hitler’는 ‘롬멜’ 장군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였지만, 다른 장군들의 의견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으므로 10개 기갑부대를 3개 집단으로 묶어 해안과 내륙 사이의 중간 지점에 배치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Débarquement de Normandie
당초 연합군이 상륙 지역의 기후, 조건 등을 감안해 결정한 상륙 일자는 1944년 5월 1일이었는데 상륙용 주정 생산 등과 같은 작전 준비가 다소 지체되는 바람에 6월 5일로 늦춰지게 된다.
한편, 연합군의 첩보교란 작전 때문에 4월 이후부터 허위 연합군 상륙 경보에 높은 수준의 경계 태세를 취하느라고 지쳐있던 독일군 측은 6월 초에 기상이 매우 악화되자 당분간 연합군의 상륙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경계 태세를 완화한다.
실제 연합군이 상륙하던 그 시점에 부대 지휘관들은 브르따뉴 지방의 ‘렌느 Renne’와 샹파뉴 지방의 ‘랭스 Reims’의 사령부로 출타중이었으며, B집단군사령관 ‘롬멜’ 장군은 6월 6일 부인의 생일 겸, 히틀러와의 작전 회의를 위해 6월 5일 오전에 사령부를 떠나 본국으로 향하고 있었단다. 히틀러에게 예비 기갑부대의 작전 지휘권을 요구할 심산으로……
* 유타 Utah 해안
제4보병사단 예하 제8, 제22보병연대 병력이 20여 척의 상륙 주정에 나눠 타고 상륙을 감행한다. 이러한 상륙 제1진의 작전은 의외로 큰 손실 없이 진행되어 상륙 3시간만에 해안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는데, 이는 효과적인 함포 지원과 해당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독일 제709 보병사단의 전투력 결함 및 상륙 배후에 대한 미군 제 82, 제 101 공수사단의 낙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초 상륙 지점으로부터 2km 가량 좌측으로 벗어난, 방어 상태가 더 취약한 해안에 상륙한 것도 행운이었다고…..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
* 오마하 Omaha 해안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미군은 해안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찌감치 상륙선으로 갈아탔기 때문에 상당 시간 동안 험한 파도와 포격에 노출되었으니…..
오마하 해변은 지형적으로 진입로가 가파라서 해안 상륙 후 진입이 어려웠으며, 상륙 해안을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 부대의 효율적인 반격으로 치명적인 손실을 입는다.
‘오크 지점 Point d’hoch’ 이라는 곳에서는 거의 토끼 사냥에 비교될 정도로 독일군의 조준 사격으로 약 2천4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니….. (영화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
* 골드 Gold 해안
상륙을 담당한 영국군 제50보병사단과 제8기갑여단이 독일군의 경미한 반격을 물리치고 순조롭게 작전을 완료하였다.
* 주노 Juno 해안
인상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독일군이 설치한 각종 상륙 거부 장애물에 의해 상륙주정 다수가 침몰하면서 의외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캐나다군 제3보병사단과 제2기갑여단 예하 상륙 부대의 300여 척의 상륙주정 가운데 약 90척이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작전 예정표대로 해안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였다고…..
* 스워드 Sword 해안
유타 해안의 미군 부대와 함께 상륙 자전의 핵심을 담당했다. 영국군 제6공수사단과 함께 독일군의 방어를 분쇄하고 해안으로부터 11km 가량 내륙에 위치한 ‘깡 Caen’을 점령해야 했기 때문이다. ‘깡’은 ‘노르망디 지방‘의 도로 요충지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점령해야 했으나, ‘포이흐팅거 Feuchtinger’ 소장(8월 1일 중장 진급)이 지휘하는 독일군 제21 기갑사단의 조직적인 반격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스워드 해안을 담당한 영국군 제3보병사단, 제27기갑여단 등은 다른 해안과 마찬가지로 중심 5-10km에 달하는 교두보 확보를 완료했다.
악재가 겹친 독일군
독일군은 거듭된 판단 착오를 일으키는데,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노르망디’ 지역을 방어하던 제 7군에 경계 태세를 발동시키지 않은 것이 우선 실수였으며, 일선 부대의 보고가 서부전선사령부에 접수되었을 때에도 신속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다.
연합군 공수부대가 낙하하여 기습 작전에 돌입하자 제7군 참모장인 ‘펨젤 Pemsel’ 소장이 01시 30분을 기하여 경보를 발령하였고, 대규모 상륙 징후가 포착되었다고 보고를 올린다. 하지만, 사령관인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연합군 공수부대의 낙하는, ‘깔레’ 지역에 상륙하기 위해 독일군의 시선을 노르망디로 분산시키고자 하는 기만 차원의 양동 작전일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에 결단을 주저한다. 부족한 방어 전력을 ‘노르망디‘로 집중하게 될 경우, 만에 하나 있을수도 있는 ‘깔레 Calais’ 지역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길이 없기 때문에……
독일군 최고위급 사령관들은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에도 상당히 오랜 동안 연합군의 제2의 상륙에 대비하고 있었다. 즉, 연합군이 ‘솜므’와 ‘센느 Seine’강 사이 지역에 재차 상륙할 것에 대비해 해당 지역에 배치되었던 기갑 및 보병 사단들을 노르망디 전선에 투입시키는데 시간을 지체했던 것이었다.
그 사이에 연합군은 전함 6척, 순향함 22척, 구축함 및 프리깃 119척의 함포 사격과 연합군의 전투기, 대지공격기, 폭격기 등의 활약으로 해안 교두보를 강화하고 후속 부대를 계속 상륙시켜, 6월 30일에는 ‘세흐부흐그 Cherbourg’를, 7월 19일에는 ‘쌩로 Saint Lo’를 24일에는 ‘깡 Caen’을 확보한다. 파리 수복은 시간문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의미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전술적 기습효과를 가져왔으며, 8월 29일까지 계속된 상륙작전은 프랑스 해방과 독일 본토 진격, 2차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유럽대륙의 해방을 가져다준 기념비적인 역사로 남았다.
근래에 공개된 영국 비밀 문서에 의하면, 연합군 측, 특히 처칠은 런던에 망명하여 프랑스의 레지스탕트를 이끌던 프랑스의 ‘드골’ 장군을 믿지 않고 상륙작전이 새나가지 않도록 감시를 하였다고…..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