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농민화가 ‘밀레 Jean-François Millet’가 1814년 10월 4일 태어난 집과 비슷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레빌 아그 농촌마을의 ‘그뤼시 Hameau de Gruchy’를 찾아가 보자. 노르망디 바닷가의 절벽 위에 위치한 마을로 가난하고 고된 농촌생활이었지만, 가족간 사랑과 화목함이 가득하여 즐거운 유년기를 보내었단다.
밀레의 생가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당시 시골농부들의 생활을 엿 볼수 있으며, 밀레의 화풍에 영향을 끼친 그 당시 사회의 문화와 정치적 상황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밀레의 화폭에 등장하는 다양한 소품들을 전시하고 있어서 의외로 생생한 감동을 준다. 밀레의 작품에 여러 번 모델이 되어 프랑스 문화재로 등재된 ‘우물 집 La maison au puits’을 뒤로하고 바닷가 쪽으로 가면서 밀레가 뛰어다니며 그렸던 파도와 바위, 절벽, 자연을 느껴보길….
밀레의 생애
파리에서 가까운 바르비종에 정착하여 작품을 그리는 이젤에 항상 모형 배를 올려두고 향수를 달랠 정도로 밀레의 작품성에 녹아있는 바닷가의 농촌 풍경과 생활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어린 아들의 데생 실력에 깜짝 놀란 아버지가 가까운 대도시로 우리에게는 ‘쉘부르의 우산’으로 귀에 익은 ‘쉐부흐그 Cherbourg’로 데려가서, ‘무쉘 Mouchel’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한다.
방학에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삿일을 돕는 틈틈이 집 주변의 풍경들을 그림으로 담았다. 23살에 시와 도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으로 파리의 ‘에꼴 데 보자흐 Ecole des Beaux Arts’에 진학하여 열심히 수학하다가 1837년, 학교에서는 더 이상 배울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차라리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며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한다.
‘쉐부흐그’에서 ‘폴린 비흐지니 Pauline-Virginie Ono’와 결혼하여 3년만에 상처하고, ‘카트린 Catherine Lemaire’과 재혼하여 슬하에 9명의 자식을 둔다. 대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대중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나체여인을 그려서 대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지만, 신실한 신앙을 갖은 할머니의 조언을 받아들여, 돈보다는 신앙을 위하여 나체 그림을 포기한다고….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던 중 전염병을 피하여 한적한 시골 ‘바르비종’에 정착하여, 만종을 비롯하여 이삭줍기 등등 수 많은 작품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