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름 휴양지 중 하나
프랑스 남서부 ‘누밸 아키텐 Nouvelle-Aquitaine’ 지방에 위치한 ‘라 로셸 La Rochelle’은 다양한 항구를 보유하여 ‘대서양의 문 Porte océane’이라고도 불리는데, 지리적 중요성으로 수 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도시를 성벽으로 에워싸면서 요새화한 것이 잔존한다. 현재 ‘구 항구 Vieux-Port’ 좌.우 양측에 우뚝 솟은 ‘쇠사슬 탑 Tour de la Chaîne’과 ‘생 니콜라 탑 Tour Saint-Nicolas’ 사이에 물을 가로질러 뻗은 쇠사슬로 입구를 지켰던 것을 알 수 있다.
14-18세기에 프랑스의 최고 활발한 군사항과 상업항으로 번성하였고, 바로 이 항구에서 출발하여 캐나다의 ‘몬트리얼 Montreal’을 비롯하여 주요 식민지를 개척한 곳이다. 항구 바깥쪽의 ‘등대 탑 Tour de la Lantern’과 도시로 진입하는 성문 ‘시계 탑 La porte de la Grosse Horloge’과 주변의 성벽 등등 중세 요새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어 볼거리가 많다.
1137년 ‘아키텐 공작’이던 ‘기욤 10세’는 ‘라 로셸’ 항구를 만들하면서 상인들에게 많은 자율권을 보장해주었고, 12세기 후반에는 그의 딸이자 여공작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Aliénor d’Aquitaine’ (사잠심왕 리처드 1세의 어머니)가 상업 특례를 주었다. 1139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Aliénor d’Aquitaine’는 주로 프랑스 인으로 구성된 ‘성 요한 기사단’과 ‘탬플 기사단’에게 특혜를 준다.
한편, 아키텐의 ‘알리에노르 Aliénor d’Aquitaine’는 프랑스 왕 ‘루이 7세 Louis VII’와 이혼하고 1152년에 자신보다 11살 연하인 ‘플랜태저넷 Plantagenêt’ 가문의 ‘헨리 2세 Henri II’와 결혼하고, 그가 1154년에 영국 국왕인 ‘헨리 2세’로 즉위하자 도시는 영국과 해상무역이 활발해진다. 프랑스 왕비도 하고 영국 왕비도 되었던 유일무이한 ‘알리에노르’!!!
1224년, 루이 8세의 공격으로 도시는 다시 프랑스 왕령이 되었고, 이후 100여년간 별일 없이 지내던 도시는 1337년 프랑스와 영국과의 ‘백년 전쟁’이 발발하며 다시 요동치다가 1453년 ‘백년 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 땅으로 남는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은 유럽 전체를 구교와 개신교 진영으로 나누어 전쟁을 하는데, 특히 프랑스 내부에서는 30년간 종교전쟁이 발발한다. 두 진영간의 화해를 위하여 ‘카트린 드 메디치’의 막내딸과 위그노파의 수장 ‘앙리 드 나바르 Henri de Navarre’를 결혼시킨다.
1572년 8울 결혼식에 참석한 위그노파들을 학살한 ‘성 바르톨로메오 Saint-Barthélemy’ 사건 이후 이 도시도 항쟁하다가 왕실군대에 결국 함락당하고 마침, 프랑스 내전을 종식시키고 ‘부르봉 Bourbon’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 Henri IV’는 ‘낭트 칙령’를 내려 프랑스 전역의 종교적 자유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다음 왕인 ‘루이 13세 Louis XIII’가 다시금 개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1620년부터 2년 동안 극심하게 반란이 일어나자 부왕의 ‘낭트 칙령’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하며 봉합되는 듯…. 1625년 2월에 재차 반란이 일어나자 ‘루이 13세 Louis XIII’ 왕의 재상 ‘리슐리외 Richelieu’ 추기경이 직접 이끈 왕실군대가 도시를 포위공격하는데, ‘장 귀통 Jean Guiton’ 시장의 인도로 15개월간 저항하다가 1628년 항복하는 것으로 끝난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의 최전선 유보트 기지로 이용되었고,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에서 1945년 5월 7일 가장 마지막으로 해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