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Provence-Alpes-Côte d’Azur) 지방의 ‘뤼베롱’ (Luberon) 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이 작고 아름다운 ‘라코스트’ 마을은 ‘메네르브’ (Menerbes)와 ‘보니외’ (Bonnieux) 사이에 위치한 인구 400 명 정도의 아주 작은 중세 마을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이 마을을 파괴하고 있다며 주민들이 반발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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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성 음란증인 ‘사디즘’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19세기 작가인 ‘사드 후작’ (Marquis de Sade)이 살았던 ‘라코스트 성’ (Chateaux de Lacoste)이 위치한 곳으로, 초현실주의 작가 ‘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 )이 1948년 후작의 성 터를 보기 위해 ‘라코스트’ 마을을 방문하였다가 이 마을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그의 작품 속에서 이 마을을 상세히 언급한다.
2001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 (Pierre Cardin)이 ‘사드 후작’의 성을 인수하여 폐허 상태를 보존하면서 복원하였고, 성의 오래된 채석장에서 음악과 연극의 여름 축제가 조직된다. 폐허가 된 성과 42채의 건물을 사들이고 여름 음악 축제를 개최하여 축제 기간 80명을 고용하는 자신이 이 마을을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변화를 싫어하는 이곳 주민들은 ‘피에르 가르뎅’이 조용한 마을을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집을 팔고 떠나는 주민들 때문에 마을에 하나뿐이던 빵가게는 폐업하고 지금은 ‘피에르 가르뎅’이 구입한 빈집들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고…..
화가 ‘베르나르’ (Bernard Pfriem)가 1970-1971년에 그곳에 미국 예술 학교 ‘ Savannah College of Art and Design‘을 세웠고, 예술계와의 넓은 인맥을 통해 ‘에른스트’ (Max Ernst), 미국인 시각미술가 ‘만 레이’ (Man Ray), 패션 사진가 ‘리 밀러’ (Lee Miller),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쏭’ (Henri Cartier-Bresson), 영국 예술가 ‘롤랜드 팬로즈’ (Roland Penrose)와 같은 인물들을 이 마을로 불러 모아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현재도 여전히 예술학교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사드 후작 (Marquis de Sade)의 생애
‘사드 후작’은 방탕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사상가이며, 성적 대상에게 육체적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쾌락을 얻는 ‘가학성애’ (加虐性愛)의 원조 ‘사디즘’ (Sadism)이라는 용어가 시작된 사람이다. 프로방스 지방에서 명성있는 ‘사드 백작’ (Comte de Sade) 가문의 후계자로 1740년 6월 2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
10살이던 1750년 ‘루이 르 그랑’ (Collège Louis-le-Grand) 중등학교에 입학해 4년간 수학했고, 유럽대륙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운 ‘7년 전쟁’ (1756-1763) 동안에 기병장교로 참전하고 대위까지 진급한 뒤 퇴역한다. 이미 이때부터 그의 잔혹성과 특이한 행동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1763년, 23세에 부유한 ‘몽트뢰유’ (Cordier de Montreuil)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지만 방탕한 생활과 여성편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1768년 파리에 붙은 ‘아르쾨이’ (Arcueil) 집에 ‘로즈 켈러’ (Rose Keller)라는 매춘부를 감금하고 학대한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사드 후작’ (Marquis de Sade)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자 3자녀와 부인, 어린 처제와 함게 파리를 떠나 1769년부터 1772년까지 자신의 영지이던 이 마을에 머무르면서, 12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을 성 안에 지어 귀족들을 초대하며 흥청망청 방탕한 생활을 이어간다.
1772년 여름, 가까운 대도시 ‘마르세이유’ (Marseille)에서 5명의 매춘부를 상대로 최음제를 먹이며 관계를 맺은 것이 탄로나고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당하자마자, 자신의 처제인 19살 ‘로네’ (Anne-Prospère de Launay)와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애정 도피행각을 벌인다. 문제는 젊은 처제가 바로 베네딕트 소속의 수녀라는 것….
1777년 체포되어 ‘뱅센느’ (Vincennes) 요새에 투옥되었고, ‘엑스’ (Aix)로 이송되던 중에 돈으로 간수들을 매수하여 도망친 ‘사드 후작’은 1778년 7월 16일 자신의 영지인 ‘라코스트’ (Lacoste) 성으로 숨어들어 조용히 살았지만, 왕명으로 파리에서부터 추격해온 관리들에게 9월 7일 체포되어 다시금 ‘뱅센느’ 요새에 감금된다.
‘사드’는 감옥에서도 다양한 음식을 반입해 먹을 정도로 비교적 편안하게 지냈지만, 운동 부족 때문인지 점차 몸이 비대해지고 쇠약 해졌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곡 및 소설 창작과 서한 작성에 바쳤고, 1784년 초에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자 1790년 4월 2일에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다.
1801년에 그의 저서들이 불경하다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또다시 음란물 유포 혐의로 투옥되었다. 1804년에는 자녀들에 의해 파리 근교의 ‘비세트르’ 정신병원(Bicêtre Hospital)에 수감되어 1814년 사망한다.
사드 후작 (Marquis de Sade)의 작품
사드 후작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소돔의 120일’ (Les Cent Vingt Journées de Sodome),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운’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인데, 성을 통해서 기성의 종교, 사회, 도덕에 철저한 비판을 했던 유물론자이며 개인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무신론, 무정부주의, 자유주의 등의 사상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지면서 사망 200 주년이 되던 2014년부터 ‘사드 후작’의 작품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