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단두대 Guillotinne’!! 우리가 잘 못 알고있는 단두대의 진실을 알고가자!!!! 단두대의 기원은, 본래 이탈리아에 존재하던 장치에서 본따 온 것이다. 두 개의 나무 기둥 사이를 초생달 모양의 날카로운 칼날이 떨어지며 사람의 목을 자르는 기계인데, 당시에는 칼 또는 도끼로 목을 자르는 참수형이나 마차 바퀴 또는 말이나 소에 묶어 죽이는 참시 형, 목을 메는 교수형보다 죄인을 고통 없이 순간적으로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당시의 대중들이 ‘국가의 면도칼 Rasoir national’ 또는 ‘과부 Veuve’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이 고성능( ?) 기계를 공식적으로는 «루이젵트 Louisette» 또는 «루이종 Louison»으로 불렀다는데,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정부의 ‘헌법 의회’에서 총무를 맡은 ‘기요땡’ 박사의 자질에 늘 못마땅해하던 한 신문 기자가 비꼬는 투로 이 기계에 ‘기요띤느 Guillotine’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오명(?)을 뒤집어 쓰고 역사에 기록된 것이란다.
’기요땡 Guillotin’ 박사
오명을 뒤집어 쓴 박사는 사형수라도 고통없는 죽음을 갖을 권리를 주장하며, 1789년 11월 28일, ‘정형외과 아카데미 Académie de chirurgie’의 사무총장이던 외과 의사 ‘앙뚜완 루이 Antoine Louis’가 고안한 기계를 사형수들의 목을 자르는데 이용하자며 ‘헌법 의회 Assemblé constituante’에 선보인다.
죄인의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같은 종류의 위법행위는 같은 종류의 형벌로 처벌하여야 한다.
Les délits du même genre seront punis par le même genre de peine, quels que soient le rang et l’état du coupable 는 생각으로….
휴머니스트이며 의사로서 삼부회의에 평민대표로 참여하였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 혁명정부의 위원이기도 하였던 ‘기요땡 Guillotin’ 박사가 자신이 만든 단두대에서 죽었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판치는데, 1814년 3월 26일 파리의 자택에서 천수를 다 누리고 76세로 자연사한다.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던 단두대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것을 죽는 날까지 억울해하면서…..
즉, 발명한 것이 아니고, 추천한 것!!!! 하지만, 혁명정부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빨리 처형하기에 안성맞춤!!
1791년 6월 3일, ‘헌법 의회’는 « 모든 사형수들은 머리를 자를 것이다. Tout condamné à mort aura la tête tranchée»라는 법령을 포고하고, ‘기요땡’ 박사와 ‘앙뚜완 루이 Antoine Louis’에게 이 기계를 빠른 시일 내에 개선할 것을 요구하였다. 독일 기술자 ‘또비아스 슈미트 Tobias Schmidt’의 제안을 수용하여, 초생달 모양의 칼날을 마름모꼴로 바꾸면서 악명 높은 단두대의 모습이 완성되어, 개선된 최신식( ?) 기계는 ‘비세트르 Bicêtre’에서 양과 시체들을 이용하여 임상 실험을 거치고…..
당시 최대의 절도범이던 ‘펠르띠에 Nicolas-Jacques Pelletier’가 1792년 4월 25일 첫 번째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행운( ?)을 갖는다. 영예로운 최초의 손님과 최신식 기계를 보기 위하여 모인 구경꾼들은 순식간에 손님( ?)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악인에게는 너무 과분한 처사라고 불평이 대단하였단다.
1793년부터 1794년 사이에 대 숙청 작업이 진행되면서 약 200,000 명의 목을 자르는데 지대한 공( ?)을 세웠으며, ‘루이 16세’, ‘마리 앙뚜와네트’를 비롯한 왕족과 수 많은 귀족의 목을 날린 단두대는 전체 높이 4.5 m, 칼날 높이 2.25 m, 무게 580 kg의 모습이다.
전국의 각 도청마다 단두대를 하나씩 설치하였고, 파리에는 죄인이 많았었는지 여러 곳에 설치하였다. Place de Grève, Place du Carrousel, Place de la Concorde, Place de la Bastille, Place de la Nation, Champ de M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