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프랑스 동영상
30년 종교전쟁
‘앙리 2세’의 부인인 ‘까뜨린-드-메디치’는 ‘프랑스와 1세’ 때부터 시작된 개혁파인 ‘위그노파’와 ‘카톨릭파’ 사이에서 중재인 역할을 자청 하였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내란 Guerres de Religion’에 불을 붙인다. 1562년 ‘바시 Vassy’시에서 카톨릭의 ‘기스공’과 ‘위그노파’의 우연한 전투가 내란의 시작이 되었고,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카톨릭파를 지원하고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은 개혁파인 위그노파를 지원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남의 집안에 감놔라? 대추놔라??? 위그노파의 수장인 ‘콜리니’가 파리를 점령하고, 온건한 신카톨릭파인 ‘폴리티크당’과 1570년에 ‘셍-제르멩 Saint-Germain’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궁정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스페인과 승산 없는 전쟁을 준비하는 ‘콜리니’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까뜨린-드-메디치’는, 1572년 8월 22일 ‘콜리니’를 살해하도록 배후 조종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아들인 ‘샤를르 9세’에게 이 사실을 고백한다. ‘까드린-드-메디치’의 딸인 ‘마흐그리트(마고)’와 ‘앙리 4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위해 카톨릭의 고장인 파리로 올라온 위그노파들을 제거해야만 하는 상황!!!!! ‘샤를르 9세’는 어머니의 편이 되어 ‘콜리니’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8월 24일 밤 1시 30분에, 파리 ‘생-제르멩 옥세루와’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미리 준비한 명부대로 파리에서 약 4천명의 위그노파를 학살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마고 여왕‘ 영화에 상세히 소개된 내용…. ‘성 바르톨로메오 Saint-Barthélemy’ 대학살!!!!!
나폴레옹 1세의 등장과 몰락
프랑스의 장군이자 제 1부통령(1799-1804), 프랑스 황제(1804-1814)를 지낸 나폴레옹 1세에 대한 영화와 논평들이 새로이 등장하면서, 프랑스에 다시금 나폴레옹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 프랑스와 서유럽 여러 나라 제도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많은 개혁을 이루어 냈고, 프랑스의 군사적 팽창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그가 몰락했을 때 프랑스 영토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보다 줄어들었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린 제 2제정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존경 받는다. 나폴레옹 가족 ‘나폴레옹’은 1769년 8월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5남 3녀의 둘째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국가도시이던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의 ‘루이 15세’에게 할양한다. 하지만,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하는 반불파와 프랑스령을 찬동하는 친불파로 나뉘는데….. 친불파이던 ‘나폴레옹’의 아버지 ‘Carle Buonaparte’는 1771년 ‘아작시오’ 지방법원의 판사 보좌관에 임명되었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1년간 프랑스의 위력을 실감하고, 미래를 위하여 1778년 두 아들 11세 ‘조제프’와 8세 ‘나폴레옹’을 프랑스 귀족 자녀들이 다니는 ‘오툉 Autun’의 군사학교에 입학시킨다. 식민지에서 유학 온 어린 나폴레옹이 왕따 당하는 것은 당연!!! ‘나폴레옹’은 한 동안 스스로를 외국인(식민지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코르시카’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고….. ‘오툉 Autun’, ‘브리엔 Brienne’, ‘파리 Paris’의 ‘샹 드 마흐쓰 Champ de Mars‘에 인접한 육군사관학교를 거쳤다. 1785년 2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남겨놓은 채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둘째이었지만 ‘나폴레옹’은 16세도 안된 나이에 가장역할을 떠 맡는다. 장남인 큰형은 신부학교에 있으니….. 나폴레옹 군 생활 그 해 […]
노르망디 상륙작전 요약
매년, 프랑스 서부해안 ‘노르망디 지역‘에서는 16개국 20여명의 정상들이 모여,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장식한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작전’ 기념식이 성대하게 치루어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프랑스와 독일의 두 정상이 한 단상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역사의 아이러니!!! 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는 바로 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데,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력과 작전 및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자. 1944년 6월6일 연합군에 의해 실시되었던 사상 최대 규모의 군부대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연안에 상륙하여, 독일군에 대한 전면적인 반격을 시작하는데…… 연합군의 작전계획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된 전략회담에서, 유럽대륙에 연합군을 상륙시키려는 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1943년 5월의 제3차 워싱턴 회담에서 ‘아이젠하워 Eisenhower’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 원정군 최고사령부는 상륙 작전 예정지를 북부 프랑스 ‘노르망디‘로 정한다. 워낙 가파른 절벽과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 때문에 이쪽으로는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독일군의 수비 상태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이었다고….. 작전명 ‘오버로드 Overlord’에는 12개 기갑사단을 포함한 39개 사단, 287만의 병력과 항공기 1만2천대, 함정 5천3백여 척 등이 준비되었다고….. `오버로드’작전이 워낙 방대한 양의 물자와 인력이 투입되어 독일군이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기 때문에, 연합군은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 ‘빠 드 깔레 Pas de Calais’ 지역이 상륙지점이 될 것처럼, 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계속 위장 무전송신, 근해 해군 기동연습 등을 통해 적을 기만하였으며,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가상 부대와 모형 전차 등을 해협 건너편에 집중 배치하고, 거짓 정보도 흘리고…… […]
루이 17세는 살아있을까?
Louis XVII 수수께끼의 루이 17세 ???? 루이 17세 왕좌에 등극하여 프랑스를 다스렸을 ‘루이 샤를 Louis Charle’!!!!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사이에 태어난 황태자 ‘루이 샤를’은 프랑스 혁명 당시인 1795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자손들은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소문의 정체는???? 알고가자, 루이 17세!!! ‘프랑스 대혁명‘의 격동기에 국왕 부부가 1793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을 때 ‘루이 샤를’은 투옥되어 혁명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고 있다가, 1795년 6월 8일 10세의 나이로 ‘탕플 감옥’에서 수감 중에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죽은 후, 생전의 황태자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5명의 검시관들은 황태자가 틀림없다고 증언하였단다. 하지만, 같은 감옥에 갇혀 있던 황태자의 누이는 시체 확인 과정에서 제외되었고, 동생이 사망한 사실도 훨씬 나중에 듣게 된다는데…. 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나이 어린 아이의 관으로는 관이 너무 크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고, 여러 가지 사실들이 알려짐에 따라 시체를 바꿔 치기 하지 않았나 하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황태자를 지키는 간수로 임명되었던 부부가, 1794년 1월 19일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황태자는 몸이 튼튼한 아홉 살 난 소년이었다는데, 약 7개월 후 ‘바라스’ 장군이 황태자를 방문했을 때에는 ‘루이 샤를’이 중병에 걸린 징후가 뚜렷이 나타났었다고….. 황태자를 감시하던 여자 간수가, 20년 후 병원에서 자기를 간호하던 수녀들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하면서, “우리 황태자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녀와 남편이 감옥을 떠나던 날에 다른 소년을 옥중으로 […]
백년 전쟁 (영국-프랑스)
프랑스는 1337-1453년 사이에 영국과 ‘백년전쟁 La guèrre de Cent Ans’으로 매우 힘든 고비를 맞는다. 전염병 페스트가 국민의 절반을 죽이고, 기근으로 국민들의 생활은 궁핍을 면할 수 없었다. 한편, 북부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의 영주가 영국으로 건너가서 영국의 왕이 되는데…프랑스 왕은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요구하고, 영국 왕조는 프랑스 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잦은 분쟁이 일어난다. 프랑스의 왕 ‘샤흘르 4세’가 후손을 남기지 않고 사망하면서, 왕의 누이와 결혼한 영국의 왕 ‘애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다. 프랑스 사람들이 영국 왕의 지배를 반대하여, ‘출가한 여자는 왕권을 상속할 수 없다’라는 법을 급히 만들고, 새로운 왕을 선출하면서 영국과의 백년전쟁이 시작된다. 각 기사들의 영웅심을 내세운 프랑스 군과, 장궁 및 석궁으로 무장된 조직적인 영국군은 전쟁이라기 보다 살육전에 가까웠다고…… ‘동레미 Domremy’에서 태어난 양치기 소녀 ‘쟌 다르크 Jeanne d’Arc’는 프랑스를 구하라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성모 마리아의 음성을 듣고, 프랑스 북부를 대 부분 빼앗기고 ‘쉬농 Chinon’ 성에 피신하여 있던 ‘샤를르 7세’를 도와 프랑스의 영토를 되찾는데 공헌한다. 1429년 5월 ‘오를레앙 Orlean’에서 영국군을 축출하고 ‘랭스 Reims‘ 대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까지도 주관하였지만, 1430년 ‘쟌 다르크’는 파리 북쪽의 ‘꽁피에뉴 성 Compiegne‘에서 체포되어 요술을 부린 ‘마녀’라는 판정을 받고 ‘루앙 Ruen‘ 시의 시장 터에서 1431년 19세의 나이로 화형을 당한다. 화형 당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선사시대 및 고대
Préhistorique 현 프랑스 영토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의 생활주거지가 남쪽 지방의 동굴에서 발견되는데 왜 그럴까???? 그들이 남긴 동물 기호는 무엇일까???? 1) 선사시대 전기 구석기 시대(약 2만년 전)의 문명은 프랑스 남서부의 ‘도르도뉴 Dordogne’ 지방의‘뻬리고흐 Perigord’ 근처에서 발굴되고 있다. ‘레 자이지 Les Eyzies’, ‘마들렌느 La Madeleine’, ‘마스 다질 Mas d’Azil’, ‘크로마뇽 Cromagnon’, ‘라스코 Lascaux’ 동굴 등이 이 시대의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동굴인데, 순록, 황소, 맘모스, 들소, 말 코뿔소의 모습이 동굴 벽에 그려져 있다. BC 4만년경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사냥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BC 6천년경부터 가축을 기르고 정착하여 농경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2) 켈트 족 시대의 골 La Gaul celte 현재 ‘브르따뉴 Bretagne’ 지방에 남아 있는 거석(巨石) 건조물들을 통해 프랑스에 최초로 거주하였던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청동기 시대(기원 전 1,800-700년까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기원전 8세기경부터 ‘인도-유로피언 Indo-European’ 계의 일파인 ‘켈트 Celt’ 부족이 이주하면서, 원주민을 몰아내고 정착하는데, 이 지역을 로마인들이 ‘갈리아 Gallia’라 부르고 이 지역에 정착한 ‘켈트 Celt’ 부족을 ‘갈리아 Gallia’ 부족이라 부르면서 ‘Gallia’가 ‘골 Gaule’로 변화된다. 3) 로마 시대의 골 La Gaul romaine ‘남불 해안 지역‘은 B.C.125-121년 사이에 로마의 속령이 되었고, 나머지 ‘골 Gaule’ 지역은 B.C. 58-51년에 걸쳐 ‘세자르 Caesar’에 의하여 정복되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이후 ‘골 Gaule’ 족의 라틴화가 추진되면서 고유문화에 로마 문화가 혼합된 ‘갈로 로망 Gallo-romaine’ […]
아비뇽 유수 (교황)
‘필립 4세’ (Philippe le Bel)는 보르도 추기경인 ‘클레멘스 5세’ (Clément V)를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다방면으로 압력을 넣는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7세’의 침략(1310~1313)으로 ‘클레멘스 5세’ 교황은 로마로 가지 못하고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영토와의 경계에 위치한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에서 떠돌아 다닌다.
아쟁쿠르 전투 (봉건제 몰락)
‘백년 전쟁’ 중이던 1415년 8월 25일 금요일 북부 프랑스의 ‘아쟁쿠르 Azincourt’ 마을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영국의 ‘헨리 5세 Henry V’는 프랑스 측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면서 승리하였고, 이 전투 이후 1420년 ‘트르와 조약’으로, ‘헨리 5세’가 ‘샤를르 6세’의 딸 ‘까뜨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면서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프랑스인들이 ‘샤를르 7세’를 중심으로 뭉쳐서 전쟁을 이어가고, 잔다르크의 출현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영국군을 프랑스 본토에서 영원히 몰아낸다. 아쟁쿠르 전투개요 영국의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이나 프랑스 내륙의 아키텐느 지방과 노르망디, 앙주지방의 영국령을 인정하라고 프랑스 왕실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415년 8월 13일 약 12,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칼레 Calais’에 상륙한다. 항구도시 ‘아흐플뢰흐 Harfleur’의 공성전에서 많은 병력과 시간을 들여 9월 22일 항복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영국군은 북 프랑스의 영국 거점인 ‘칼레 Calais’로 퇴각하려 했다.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군의 사령관 ‘샤를르 달브레 Charles d’Albret’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퇴각하는 영국군을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우고 아쟁꾸르 마을에 진을 치는데, 장궁병 위주로 구성된 6,000-9,000명 정도의 영국군과 12,000-18,000명 정도의 중무장 기사들인 프랑스 군대가 마을에서 가까운 숲 사이의 개활지에서 격돌한다. ‘헨리 5세’는 그의 군대를 좁은 길목에 배치하는데, 장궁병들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중기 병들과 기사들은 중앙에 배치하면서 가장 중앙에는 약 200명의 궁수를 배치한다. 프랑스인들은 병력이 상대적으로 많고, 무구의 장비가 더 우월한 […]
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 구체제, 앙시앵 레짐은 15세기말 프랑스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전력을 정비하면서, 외부로 팽창해 나가려는 움직임과 함께 문화적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나고, 이탈리아 문화에 열등의식을 갖고 있던 상태에서 탈피하여, 프랑스의 독자적인 문화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시기이다. 르네상스 Renaissance 와 프랑스와 1세 ‘프랑스와 1세’의 집권기에 이탈리아 원정에서 ‘르네상스 문화’의 화려함에 자극을 받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청하여 문화 부흥기를 이룬다. ‘끌로뤼쎄 Clos Lucé’에 정착하여 문화를 전수한 셈….. 1515-1610년 사이에 프랑스는 예술, 문화적으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으며, ‘아재-르-히도 Azay-le-Rideau‘, ‘쉬농소 Chenonceaux‘ 성을 비롯하여 ‘르와르 Loire’ 강변에 ‘르네상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성들을 건설하며, 1550년경에 이르러 이탈리아 및 고대 ‘그리스 문화‘, 로마 문화의 영향과 전통이 결합되어 프랑스의 고전 양식이 등장한다. ‘프랑스와 1세’가 없었다면, 아마도 프랑스의 문화는 달라졌을 것…… 종교 개혁과 앙리 4세 ‘루터’와 ‘캘빈’의 자극으로 ‘종교 개혁’의 운동이 시작되고, 교회의 부와 권력의 남용을 비판하며 성서의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지만, 교황에게 충실한 교황 예찬론 자들과, 개혁을 지지하던 ‘위그노’ 사이의 종교적인 갈등은 시민 전쟁 즉 종교 전쟁으로 비화된다. 1572년 8월 24일 ‘생 바르텔미’의 학살 사건은, ‘앙리 4세’와 ‘마고’의 결혼식 전날 밤에 구교도들이 ‘옥세르와 성당’의 종소리에 맞추어 숨겨놓은 무기를 꺼내 들고,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 ‘마고 여왕’으로 영화가 소개된 내용… 어머니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종교 속에서 키워진 ‘앙리 4세’가 1589년 왕위에 오르고, 종교 전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안정을 꾀한다. […]
중세 봉건시대
종교가 세상을 다스리며, 문화의 암흑 시대로 알려졌던 중세 봉건시대. 하지만, 나름대로 문화의 꽃을 피웠던 시기….. 9-12세기 중세에는 왕권이 축소되고,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조직이 발전된다. 알고가자, ‘중세 봉건시대 Le Moyen Âge’!!! 중세 봉건시대 Féodalité 영토를 소유한 영주들은 주권자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재판권과 조세권을 갖고, 영지의 방어를 위하여 사조직을 만들며, 기사들에게 절대적인 충성과 군사적, 재정적 도움을 맹세하도록 요구한다. 그 댓가로 영주는 그들에게 땅과 봉토를 부여하여 지방 자치권을 형성하고, 소 영주는 대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세금을 바침으로서 계급 사회의 틀이 완성된 것이라고….. 987년 ‘위그까페 Hugues Capet’가 왕으로 추대되어 ‘까페 왕조 Capetiens’가 성립되고, 전형적인 중세 봉건제도가 정립되었으며, ‘골’ 부족과 ‘프랑크’ 부족간의 동화가 가속화 된다. 1328년 Philippe 6세에 의하여 ‘까페 왕조 Capet’의 방계인 ‘발르와 왕조 Valois’가 수립되고, 프랑스 왕권계승을 주장하는 영국의 침입으로 1337-1453년에 걸친 백년전쟁이 시작된다. 사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왕권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 또한 1348-1360년 사이에 남불의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시작된 ‘흑사병(페스트)’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15세기말부터 이탈리아로부터 ‘르네상스’ 문화가 도입되어 16세기에 ‘르와르 강 Loire‘ 유역을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1560-1598 년에 걸쳐 신교도와 구교도간의 종교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된다. 교회의 영향 Influence de l`eglise 회교도들의 손에 넘어간 성스러운 땅을 되찾는다는 구실 하에 영주들과 수도승 병사들은 많은 이익의 근원인 식민지 중앙-아시아에 교회의 이름으로 11세기와 13세기에 십자군을 파견한다. 특히, 프랑스의 영주즐이 주축을 이루어, 왕권 강화와 교황권 강화에 힘을 실어준다. […]
철가면은 누구일까???
Masque de fer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른 지 60년째 되던 1703년 ‘바스티유’ 감옥에서 34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벨벳가면을 쓴 채로 죽은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낭만주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 Alexandre Dumas’가 소설화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집중 된 정체 불명의 사나이, 철가면!!! 두 명의 간수가 항상 밀착감시를 하였으며, 외부인과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고, 심지어 음식은 감옥 소장이 직접 날라다 주는 환대(?)를 받았던 이 사나이는 과연 누구였을까? 루이 13세 ‘앙리 4세’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에서 시집온 ‘마리 드 메디치 Marie de Medici’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 13세 Louis XIII’가 9살이 되던 1610년에 아버지인 ‘앙리 4세’가 암살되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모후인 ‘마리 드 메디치’가 섭정을 하면서, 14세가 되던 1615년 스페인 ‘펠리페 3세’의 딸인 ‘안느 도트리쉬 Anne d’Autriche’와 결혼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며 오랫동안 별거를 한다…… 23년 동안!!!!! 당시의 재상이자 추기경인 ‘리슐리유 Richelieu’가 어떤 방법(?)으로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데 성공을 하였고, 1638년 왕비 ‘안느 도트리쉬’가 ‘루이 14세’를 출산한다. 흔들리던 왕조의 권위를 강화시킨 ‘루이 14세’의 출생을 기뻐하면서도, 생산 능력이 없다고 (고자) 소문이 났던 왕에게서?????? ’리슐리유’가 국왕 부부의 동의를 얻어 왕족 중의 하나를 왕비와 동침 시켜서 ‘루이 14세’를 낳았다는 이상한 소문이 퍼진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만 5세의 나이로 국왕이 되지만, 모후인 ‘안느 도트리쉬’와 추기경 ‘마자랭 Mazarin’이 11년간 섭정을 하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해외로 추방당하여 망명 생활을 하던 친아버지는 […]
프랑스 왕조 계보
서유럽의 가장 노른자위 땅 떵어리를 차지하다보니, 바람 잘 날 없던 프랑스 왕조 역사를 알고가자!!!! 여러 분파의 골르와 족이 서로 싸움을 멈추지 않는 가운데, 훈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민족 대이동으로 여러 종족들이 프랑스 땅에 정착하면서 영토 분쟁이 시작되는데…… 살아 생전 모습을 관 뚜껑에 조각하였기에, 80 여개의 프랑스 왕과 왕비들 관을 보관한 ‘생 드니’ 성당을 방문하면, 신권에 가까운 최고 권력자들의 얼굴을 만져 볼 수도 있다. 고딕건축 양식이 탄생한 곳 이기도 하다. 왕족의 납골당, 강추!!! 메로뱅 왕조 Merovingiens 498-768 서로마가 망하면서, 춘추전국 시대이던 프랑스 땅은 481년 ‘끌로비스 Clovis’에 의하여 통일이 되고, 카톨릭으로 개종하며 왕으로 등극하는 498년 ‘메로뱅 왕조 Merovingiens’를 세운다. 다빈치 코드에 의하면, 예수의 후손이라는 전설이….. 믿거나 말거나^_^ 카롤링 왕조 Carolingiens 768-987 이 후, 프랑크 족 ‘샤흘르마뉴 Charlemagne’의 정복으로 현재의 북부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를 포함하는 거대한 프랑크 제국을 세우며 ‘카롤링 왕조 Carolingiens’가 768년부터 시작된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광장에 서 있는 동상이 바로 유럽 최초의 신성로마제국 대제 ‘샤흘르마뉴’!!!! 하지만, 형제간에 유산을 똑같이 분배하는 프랑크 족의 관습이 원인이 되어, 손자들 세대에 이르러 집안 싸움으로 치닫다가, 843년 ‘베흐덩 Verdun’ 조약으로 제국은 3등분 된다. 현재의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을 아우르는 영토를 지배하던 왕조. 까페 왕조 Les Capetiens 987-1328년 실제 프랑스의 역사가 시작되는 ‘까페 왕조’부터 ‘부르봉 왕조’ 까지 변천사를 알아보자!!!! * 위그 까페 Hugues Capet (941-996) 까페 왕조의 […]
프랑스 주요 100 대 역사
프랑스의 역사 흐름을 큰 줄거리로 간단히 알고가자!!!! 역사의 흐름을 알고가면 문화를 이해하기에 훨씬 도움이 된다. * 기원전 15000 : 라스코 동굴벽화 선사시대 유물로서 동굴주거에서 예술을 발달시킴. 똑 같이 만들어 놓은 ‘라스코 II 동굴‘을 방문하여 선사시대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다. * 기원전 4500 : 고인돌 문화 농경사회가 정착되고 죽은자들을 위한 무덤으로 고인돌을 세운다. 지금도 ‘브르따뉴 지방‘에 산재하여 있다. * 기원전 52년 : 로마지배 시대 골르와 족의 수장으로 로마에 맞서 싸우던 ‘베흐생제흐토릭스 Vercingetorix‘가 ‘알레지아 Alesia’ 전투에서 로마의 ‘시저’에게 항복하면서, 약 400년 동안 전체 프랑스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 177년 : 그리스도 인들의 수난 2세기 경부터 프랑스 땅에 퍼지지 시작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탄압이 심하였으며, 177년 리용에서 대학살이 일어난다. 4세기 말엽에 ‘뚜르 Tours’의 ‘생 마르땡 Saint Martin’ 주교에 의하여 전체 프랑스에 복음이 전파된다. * 496년 : 프랑코 왕국 끌로비스 개종 훈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민족 대이동으로 여러 종족들이 프랑스 땅에 정착하고, 프랑크 족의 끌로비스에 의하여 481년 통일되며, 496년 최초의 ‘프랑스 왕조‘ ‘메로뱅 왕조 Merovingiens‘를 세운다. * 732년 : 회교도의 패배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회교도들이 프랑스를 침공하지만, 서부 프랑스의 ‘쁘와티에 Poitiers’ 전투에서 ‘샤흘르 마흐텔 Charles Martel’에게 패배하면서 급속히 쇠퇴한다. * 800년 : 샤흘르마뉴 대제 프랑크 족의 ‘샤흘르마뉴’에 의하여 ‘카롤링 왕조 Carolingiens‘가 768년부터 시작되고, 800년 12월 25일 ‘레옹 3세 Leon III’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임명된다. * 885-886년 : 바이킹의 파리 […]
프랑스 혁명
Révolution française 세금과 폭정에 허덕이던 가난한 민중이 흘린 피로, 사치와 낭비의 화신인 프랑스 왕정을 무너트리고, 자유를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 대혁명!!!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진실을 알고가자!!!! 프랑스 대혁명 사회적 배경 ‘루이 14세’ 시대 절정에 달하였던 ‘부르봉 왕조’의 권위는 ‘루이 15세’와 ‘루이 16세’에 이르러 점차 약화된 반면, 산업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한다. ‘볼테르 Voltaire’, ‘몽테스키외 Montesquieu’, ‘쟝 작크 루소 Rousseau’에 의하여 확산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평등주의가 확산되면서,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층에 대한 평민 계층의 비판 의식이 발달하면서 혁명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한다. ‘쟝 작크 루소’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그의 무덤이 있는 ‘에흐므농빌 Ermenonville’의 정원은 당시의 사회 정신과 철학을 표현하고 있어서 꼭 가볼만하다. 프랑스 대혁명 초기와 제 1공화국 무조건적인 미국의 독립 전쟁 원조로 인한 국가의 재정이 바닥이 나자, 1789년 5월5일에 ‘루이 16세’가 재정난 해결을 위하여 ‘삼부회 Etats Généraux’를 소집하지만, 평민들의 대표로 참석한 ‘부르주아 Bourgeois’들을 제외시키고 새로운 세금을 결정한다. 귀족이면서도 평민들 편에 섰던 ‘미라보 Mirabeau’의 주관으로 평민 대표들이 철야 농성을 하면서, 특권을 폐지하고 평등 과세를 주장한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6월17일 평민 대표들만으로 구성된 ‘국민 의회’를 선포하고, 7월9일 ‘제헌 의회’로 개칭하여 헌법 제정을 추진한다. 혁명군에 의하여 상징적인 정치범 수용소 ‘바스티유 Bastille 감옥’이 7월 14일에 함락되면서 드디어 시민들이 무장을 갖추게 되고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며, 7월 16일 ‘파리 꼬뮌 Commune 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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