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상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지존
– 오귀스트 로댕
프랑스 북부 ‘오 드 프랑스 Hauts-de-France‘ 지방의 ‘삐까흐디’ 수도인 ‘아미앵’은 파리에서 북쪽으로 115 Km 떨어진 ‘솜 Somme’ 강 연안에 위치하여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며, 인구 13만 5천명의 아미앙 인구와 주변 지역까지 합치면 34만명의 중요 산업도시이다.
십자군 정쟁 이후, 세례 요한의 성물(해골)을 가져오면서, 중세 유럽의 성지순례 코스로 수많은 순례객이 몰려 들었고, 런던과 브뤼셀, 파리를 연결하는 삼각형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위치를 기반으로 중세 이래 고급 포목 제조업으로 번영을 이루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구석기 시대부터 정착민이 생활하였던 ‘골 Gaules’ 족의 땅을 정복하던 로마의 시저가 ‘사마로브리바Samarobriva’(솜의 다리)로 명명하였고, ‘암비아니 Ambiens’ 부족(현재 이름의 기원)의 주요 도시인 이 곳에 로마군단이 병영을 설치하면서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춘다. 최초의 주교인 ‘피르맹’ 성자에 의해 4세기에 그리스도교화 되었고, 동쪽에서 밀려드는 이민족의 대이동으로 도시의 주인이 수 없이 바뀌다가, 5세기에 프랑크 족의 수장인 ‘메로베 Mérovée’ 가 왕으로 등극한 곳이다.
9세기 중엽부터는 북쪽에서 내려와 노르망디 지방에 정착한 바이킹족에게 수탈 당하였고, 1113년 ‘필립 오귀스트 Philippe Auguste’ 왕과 노르망족이 군신의 예를 맺는 조건으로 자치구로 인정하으며, 1185년 ‘필립 2세’에 의하여 왕령으로 귀속된다. 15세기에는 부르고뉴 공 가문의 영토가 된 일도 있고 16세기 말에는 스페인에 점령된 때도 있었다. 수없이 바뀌는 통치자들로 도시는 요새화되며 축조된 성채가 지금도 남아있다.
1802년 나폴레옹 1세가 연합군을 격파하고 이곳에서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나폴레옹이 정복한 땅을 인정하는 ‘아미앙 조약’으로 유럽에 잠시 평화가 찾아온다.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발달된 직물산업을 바탕으로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중세 방어를 위한 성벽을 없애고 순환도로를 건설하며 근대화 된다. 1849년 파리와 연결하는 최초의 기차가 건설되면서 더더욱 발전하며 인구가 집중되는데, 열악한 위생으로 1866년 콜레라가 번창하였으며, 1870년 보불전쟁 당시에 프러시아 군대에 의하여 점령된다.
1차대전 중 영국군의 주요 지휘부가 운영되면서 1918년 3월 이후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7백채의 가옥이 대파되었다. 또한, 2차 대전 중 막대한 피해를 입어 도시의 60%에 해당하는 4,700채의 가옥이 대파되고 1만 7천 채가 손상되었지만, 1950년대에 대대적인 재건을 거쳐 역주변의 ‘뻬레탑 Tour Perret’ (높이 104m)과 ‘문화원 Maison de la Culture’, ‘아미앙’ 대학 캠퍼스 등이 신축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Cathedrale Notre-Dame
도심 중앙의 ‘노트르담 대성당 Cathedrale Notre-Dame’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가장 완벽한 고딕양식 성당으로 기독교의 영광과 ‘아미앙’의 번영을 알려준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최고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자랑하는 샤르트르 대성당, 프랑스 왕들의 도유식을 거행하는 랭스 대성당과 더불어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고딕 건축물로 꼽히는 아미앙 대성당은 198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발롱 Wallon de Sarton’이라는 이 지방의 교회 참사원이 1204년 제 4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는데,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약탈하는 과정에 ‘세례 요한’ 성자의 유골을 갈취하여 1206년 12월 17일 가져와 성당에 모신다.
성지순례객들이 모여들면서 성당을 개축하기로 결정하고, 아미앙 주변의 식물에서 추출한 염색 원료인 ‘아미앙의 청색 Bleu d’Amiens’ 거래로 부유해진 주민들의 헌금에 힘입어, 1220년 ‘호베흐 Robert de Luzarches’의 설계에 따라 시축되어 1270년에 완성된다. 다른 성당들에 비하여 단기간인 50년만에 건설되어 시대적 흐름이 반영되지 않고 전체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측면 예배소들은 1290-1375년에 새로 추가되었고 남쪽의 종탑은 1366년, 북쪽탑은 지반 문제로 1402년에 완성되었다. 1385년에 프랑스의 왕조 중에 미친 왕으로 기록된 ‘샤를르 6세’가 결혼식을 이 곳에서 성대히 치룬다.
1498년 성당이 구조적인 결함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버팀벽 보강 공사를 하면서 얇은 철 띠로 성당의 골조를 둘러싸는 공사를 하였는데, 아직도 건재하다. 장미형 스테인드글라스는 16세기, 성당 좌우익부 첨탑은 1528년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고, 1850년 ‘비올레 르 뒥 Viollet-le-Duc’에 의해 복원되었다.
성당 정면은 3개의 문으로 13세기 조각예술의 현황을 한눈에 보여준다. 중앙문인 ‘구세주의 문 Portail du Sauveur’의 합각머리는 예수상으로 장식되어 있어 일명 ‘아미앙의 신 Beau Dieu d’Amiens’으로 불리운다.
측면 입상은 12사도와 4인의 예언자상이다. 합각머리에 최후 심판과 예수의 영광이 조각되어 있다. 토대 부분의 4잎무늬 장식에 덕과 악, ‘아미앙’의 각종 장인술과 직업들, 우화의 동물들(여우, 늑대, 황새, 까마귀)이 조각되어 있다.
좌측 ‘생 피르멩 문 Portail de Saint-Firmin’은 ‘삐꺄르디’의 수호자로 ‘아미앙’의 첫 주교인 ‘피르멩 Saint Firmin’에게 바쳐진 문으로 그의 일생이 조각되어 있고 대형 입상들은 ‘아미앙’의 주교들과 지방의 성자들이다.
우측 ‘성모 문 Portail de la Mere-Dieu’은 성모 승천과 죽음이 조각되어 있고 성모 수태고지, 성모 방문, 자헌첨례, 동방박사들, 솔로몬왕, 사바의 여왕을 상징하는 대형입상들이 일군을 이루며 성모 마리아를 둘러싸고 있다. 그 위로 유대왕과 성자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내부는 단호함과 우아함, 뛰어난 채광으로 아름답다. 본당은 길이 145m, 너비 15m, 높이 43m로 126개의 기둥이 솟아있어 고딕건축에서 추구하는 상승감을 준다. 성가대 주위 성직자석(1508-1522)은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구약 성경과 우화, 일상사에서 따온 약 4천의 인물이 참나무로 조각되어 있다.
걸작인 성가대석(1488-1531)은 ‘성자 피르멩’과 ‘세례 요한’의 일생이 다색의 돌로 조각되어 있다. 측면 예배소는 13-14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 각종 입상과 묘분(대체로 17-18세기)들로 장식되어 있다.
르 베프르와 Le Beffroi 종탑
2005년 7월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러한 형식의 종탑은 벨기에와 프랑스의 북쪽 지역에서 외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 자리에는 12세기에 자율적인 도시방어를 위하여 세워진 목조 종탑이 화재로 소실되자, 1406-1410년에 하단부를 석조로 만들었고, 1749년부터 11톤의 종을 보유한 높이 52m의 종탑이 세워진다.
시의원들의 회합장소로 사용되다가 감시탑, 문서보관소, 무기고, 교도소 등으로 이용되어 온 역사적인 건축물이지만,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5월 10일 융단폭격으로 소실된 지붕을 폐허상태로 방치하다가 1989년 말끔히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