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중이던 1415년 8월 25일 금요일 북부 프랑스의 ‘아쟁쿠르’ 마을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영국의 ‘헨리 5세 Henry V’는 프랑스 측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면서 승리하였고, 이 전투 이후 1420년 ‘트르와 조약’으로, ‘헨리 5세’가 ‘샤흘흐 6세’의 딸 ‘까뜨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면서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프랑스인들이 ‘샤를르 7세’를 중심으로 뭉쳐서 전쟁을 이어가고, 잔다르크의 출현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영국군을 프랑스 본토에서 영원히 몰아낸다.
아쟁쿠르 전투개요
추천 여행 영국의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이나 프랑스 내륙의 아키텐느 지방과 노르망디, 앙주지방의 영국령을 인정하라고 프랑스 왕실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415년 8월 13일 약 12,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칼레 Calais’에 상륙한다. 항구도시 ‘아흐플뢰흐 Harfleur’의 공성전에서 많은 병력과 시간을 들여 9월 22일 항복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영국군은 북 프랑스의 영국 거점인 ‘칼레’로 퇴각하려 했다.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군의 사령관 ‘샤흘르 달브레 Charles d’Albret’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퇴각하는 영국군을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우고 아쟁쿠르 마을에 진을 치는데, 장궁병 위주로 구성된 6,000-9,000명 정도의 영국군과 12,000-18,000명 정도의 중무장 기사들인 프랑스 군대가 마을에서 가까운 숲 사이의 개활지에서 격돌한다.
‘헨리 5세’는 그의 군대를 좁은 길목에 배치하는데, 장궁병들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중기 병들과 기사들은 중앙에 배치하면서 가장 중앙에는 약 200명의 궁수를 배치한다.
프랑스인들은 병력이 상대적으로 많고, 무구의 장비가 더 우월한 중무장 기사부대들의 숫자가 많다는 점에서 승리를 확신했다. 중세전투에서는 중무장 기마병의 파괴력으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던 때 !!!! 하지만, 전황을 결정한 것은 지형과 장마로 인한 진창의 땅이었다. 점점 좁아지는 병목안 현상처럼, 프랑스군은 전군을 한꺼번에 투입할 수 없었다.
프랑스군은 너무 밀집해 있어서 자신들의 무기를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였고, 말에서 내린 중무장 기사들이 23-27kg 정도의 갑옷을 입고 진흙탕을 걸어서 영국군의 제 1선까지 도착할 무렵에는, 갑옷과 투구 속에서 발생하는 열과 산소의 부족으로 극도로 피로하여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다.
반대로, 가벼운 천이나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영국의 보병은 진흙탕에도 별 어려움 없이 활동이 자유로워서 백병전이 시작되었을 때 민첩하게 움직이며 기사들을 쓰러 트린다. 기력이 다한 프랑스의 중무장 보병대는 땅에 쓰러지고 아군을 구하기 위해 8,000명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의 기병대가 도착하자 혼란은 더욱 더 심해졌다. 진흙탕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기사들이 도륙 당하거나 서로 밀치면서 압사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패전하게 된다. 영웅심에 들뜬 기사 위주의 중세전쟁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아쟁쿠르 전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