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아름다운 샹티이 성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경치, 공원, 박물관을 자랑하는 샹티이 성은 숨은 관광 명소 중의 하나!!! 루브르 박물관 다음으로 중요한 작품을 소장한 콩데 박물관!!!
추천 여행
이 곳은 역사 깊은 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박물관과 녹음이 우거진 드넓은 정원, 프랑스 경마의 수도라 불릴 만큼 잘 발달되어 있는 경마장, 마사, 말 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다.
이 성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도 무수히 많고, 특히 007 시리즈에도 등장하는 이 곳을 방문해 보자! ‘파리의 연인’ 촬영지 ‘몽빌라젠느 고성’이 아주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으니 꿩먹고 알먹고…..
역사 Histoire
1671년 왕 ‘루이 14세’가 이곳에 초대 된날 그 유명한 요리사 ‘바텔 Vatel’이 요리 재료 배달의 지연으로 왕의 식사가 준비 되지 못해 자살한 곳이기도 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림 샹티이 Crème de Chantilly’는 바로 이곳에서 탄생한다. 주차장에서 직접 만들어서 판매한다.
‘샹티이 성’은 ‘오흐그몽 가문 les Orgemont’, ‘몽모랑시 가문 les Montmorency’, ‘부르봉 콩데 가문 les Bourbon-Conde’ 3대 가문에 의하여 완공된 것 이다. 파리 주변 지역에서 가장 큰 세 개의 숲(샹티이 Chantilly, 아라트 Halatte, 에흐므농빌 Ermenonville)과 인접한 7,800 헥타르 면적에 세워져 있고, ‘루브르 박물관‘ 다음으로 수많은 중요한 걸작들과 희귀 필사본, 고서를 소장한 ‘콩데 박물관 Musee Conde’은 ‘오말 공작 Duc d`Aumale’의 공헌으로 만들어졌다.
회화 1,000점, 스케치 2,500점, 판화 2,500점, 필사본 1,500점, 30,000권의 고서. 1884년 직계 후계자가 없는 ‘오말 공작’은 자신의 재산과 그 동안 수집한 모든 예술품, 회화, 고서 등을 ‘프랑스 학술원 Institut de France’에, 절대로 작품이 외부로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기증한다.
1. 오흐그몽 가문 Orgemonts
14-15세기에 ‘오흐그몽 Orgemont’ 가문이 건설한 성의 자취는 없어지고, 해자와 맞닿는 7개의 망루 기초 부분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1484년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삐에르 오흐그몽 Pierre d`Orgemont’은 직계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그의 조카인 ‘기요옴 드 몽모랑시 Guillaume de Montmorency’에게 유산을 상속한다.
2. 몽모랑시 가문 Monmorency
15-17세기 프랑스 왕족 가문에서 가장 권력이 강하던 ‘몽모랑시 Monmorency’ 가문의 소유 하에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프랑스와 1세’와 ‘앙리 2세’ 군대의 원수를 지낸 ‘안느 드 몽모랑시 Anne de Monmorency’는 탁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미 자신의 성인 ‘에꾸앙 성 Chateau d`Ecouen’을 설계한 건축가 ‘쟝 뷜랑 Jean Bullant’에게 의뢰하여 1560년부터 작은 성을 짓기 시작한다. 현재 자신의 청동 기마상이 있는 테라스도 기획하였으며, 7개의 예배당을 건립하지만 잔존하는 것은 3개뿐이고, ‘에꾸앙 성’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의 예술품 중에는 ‘푸쉬케와 큐피터’의 사랑을 표현한 44개의 채색 창이 있다.
그의 손자인 ‘몽모랑시의 앙리 2세 Henri II de Monmorency’가 정원에 ‘실비의 집’을 건설하였고, ‘루이 13세’에게 대항한 죄로 참수당하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지만 ‘부르봉-콩데의 앙리 2세’에게 시집간 누나가 1643년 재산권을 되돌려 받는다.
3. 부르봉-콩데 가문 Bourbon-Condé
왕과 사촌간인 ‘부르봉-콩데 le Bourbon-Condé’ 가문이 소유하면서 ‘부르봉-콩데의 루이 2세’ 즉 ‘그랑 콩데 Grand Condé’(162-1686)는 17세기 정원가로, 베르사유 궁전의 모델인 ‘보 르 비꽁트‘ 성의 정원과 ‘쏘 공원‘을 계획한 ‘앙드레 르 노트르’에게 의뢰하여 정원을 정리하며 운하를 만들었고, 당대의 유명한 문인과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무도회나 불꽃놀이를 개최한다.
손자인 ‘부르봉-콩데 왕자’로 불리는 ‘루이-앙리 Louis-Henri’는 ‘루이 15세’의 총리로 재임하면서, 18세기 건축의 걸작인 ‘큰 마구간 Grandes Ecuries’을 ‘쟝 오베르 Jean Aubert’에게 의뢰하여 화려하게 건설한다. 윤회설을 믿었는데, 자신이 다음 생애에는 말로 태어날 것으로 믿었단다. 또한, 원숭이가 인간의 역할을 하는 벽화로 장식된 ‘원숭이 방 Singeries’을 만들도록 주문하였으며, 경비 병실에 전시되고 있는 사냥 장면의 작품들을 ‘우드리 Oudry’에게 의뢰하였다고…..
‘콩데 왕자’로 불리는 ‘루이-죠셉 Louis-Joseph’(1736-1818)은 현재 ‘프랑스 학술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앙기앵 성 Chateau d`Enghien’(아들 이름)을 만들고, 영국 양식과 중국 양식이 혼재한 정원을 만든다. 정원에 시골 풍의 초옥 5채를 만들었는데,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 조성된 ‘마리 앙투와네트의 초옥’은 바로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 이 곳이 바로 원조!!!!!
프랑스 1차 대혁명 (1789)의 격변기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하자마자 영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혁명 정부는 모든 예술품을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송시키고, 이 아름다운 성을 감옥으로 사용한다고…. 1799년에 정원은 파괴되고, 큰 성은 테라스 부분까지 완전히 파괴된다.
왕정 복고 (1815) 시절
1815년 ‘나폴레옹 1세’의 몰락과 함께 ‘’루이-죠셉 Louis-Joseph’의 가족은 다시 이곳에 정착하고, ‘루브르 박물관’에 이송된 예술품과 귀중품들의 일부를 되 돌려받는다. ‘루이-죠셉’의 아들인 ‘부르봉 공작 Duc de Bourbon’의 유일한 후계자 ‘앙기앵 공작 Duc d`Enghien’은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나폴레옹 1세’의 계략으로 유인 체포되어 ‘뱅센느 성‘의 해자에서 무참히 총살을 당한다.
4. 오말 공작 시대 Duc d`Aumale
직계 후손이 없는 ‘부르봉 공작’은, 프랑스 마지막 왕 ‘루이 필립 Louis-Philippe’의 5째 아들인 ‘앙리 오를레앙 Henri d`Orleans’ (오말 공작 Duc d`Aumale)의 대부이다. 이 아이가 8살이 되던 1830년에 대부가 자살을 함으로써, 모든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 받는다. 8살에 프랑스 최고의 벼락 부자가 된 셈….
18세이던 1840년부터, 프랑스가 식민지 전쟁을 치루던 ‘알제리’에서 군인으로 복무하였고 1843년 21살의 어린 나이로 ‘스말라 다브델 까데흐 Smalah d`Abdel-Kader’를 점령할 때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국가적인 영웅이 된단다.
더군다나, 25살에는 ‘알제리’ 총독이 된다. 젊음과 부와 권력을 겸비한 ‘오말 공작’이 사교계에 진출하여 수 많은 염문을 뿌리는 것은 당연!!!! 아들의 바람기를 잠재우기 위하여, 결혼을 학수고대하던 ‘루이 필립’의 바램으로, 먼 사촌간인 ‘마리 까롤린 Marie-Caroline de Bourbon-Sicile’과 결혼을 하고, ‘샹티이’ 성을 개조하여 정착하면서 바람기는 잠자고, 18세기 작품들을 수집하여 신혼 집인 ‘샹티성’을 아름답게 꾸미는데 노력한다.
프랑스 3차 대혁명 (1848) 후 영국 망명
3차 프랑스 대혁명으로 아버지인 ‘루이 필립’ 왕조가 무너지던 1848년,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1848-1871년까지 영국에서 아무런 활동 없이 망명 생활을 하면서 값진 고서, 보석, 예술품과 특히 그림들을 수집하는데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서 옛 군대 영웅이 수집가로 변모한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할일은 없고, 돈은 많고…
1854년 런던 경매장에서 ‘니꼴라 뿌생 Nicolas Poussin’의 대표작인 < 무고 인들의 학살 Massacre des Innocents >을 구입하고, 1856년 ‘젠느 Genes’의 여자 수녀원에서 ‘램부르그 Limbourg’ 형제가 15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가장 귀중한 중세 시대의 필사본인 ‘베리공작의 부유한 시간 Les Tre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을 구입한다. 바로 이 성을 유명하게 만든 보물!!! 자기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 고화, 고서, 중세 시대의 필사본 등을 집중적으로 수집하면서 언젠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대한다.
제정의 몰락 (1870)과 귀환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이 무너지면서 1871년에 프랑스로 귀환하여 ‘샹티이’ 성에 정착을 하고, 곧바로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하여, 1799년 파괴된 후로 폐허 상태로 남아있던 ‘큰 성’을 복원한다.
‘오말 공작’의 큰 아들은 영국 망명 시절인 1866년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다가 21살의 한창 나이에 열병으로 죽고, 부인은 프랑스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1869년 사망하였고, 프랑스로 귀환하고 얼마 후에 둘째 아들이 18살의 나이로 죽어 버렸으니….. 인생무상!!!
가족의 불행을 잊고자, ‘샹티이’ 성을 복원하고 정원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모든 시간을 투자하는데, 건축가 ‘오노레 도메 Honore Daumet’가 이미 존재하던 건물과 조화롭게 절충주의 양식으로 성을 건설하고 프랑스 양식의 정원으로 꾸민단다.
새로 건설한 성은 천정 창으로 조도를 받아들이고, 붉은색의 벽면에는 그림을 여러 단계로 걸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서, 당시 19세기의 박물관 스타일을 갖추고 있다. 성이 완성되자 ‘오말 공작’은 다시 수집을 시작하는데, 1876년에 유명한 ‘알렉상드르 르느와르 Alexandre Lenoir’의 초상화와 ‘그뢰즈 Greuze’, ‘와토 Watteau’의 작품을 사들인다.
1879년에 국립 박물관 소장인 ‘프레데릭 라젵 Frederic Reiset’에게서 ‘까르똥 Quarton’, ‘뿌생 Poussin’, ‘앵그르 Ingres’, ‘제라흐 Gerard’의 작품들을 대거 수집하고, 그 후로는 소장품의 장르를 채우기 위하여 한 작품씩 선별하여 수집을 한다.
프랑스 학술원 Institut de France
1871년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 되어, 성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왕성한 의욕을 보이던 ‘오말 공작’ !!! 정세가 급변하면서, 다시금 해외추방을 당할 위기에 처해지자……. 직계 후손이 없는 ‘오말 공작’은 자신의 모든 재산과 그 동안 수집한 모든 예술품, 회화, 고서 등을 ‘프랑스 학술원 Institut de France’에 기증하고, 말년을 조용히 보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정부를 상대로 거래를 한다. 이 땅에 묻히고파~~~~
참고로, 1795년 세워진 프랑스 학술원 Institut de France은 5개의 아카데미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