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수도원과 수 많은 고택주거와 물과 바람을 이용한 방앗간, 수 백여 채의 돌집 등등의 다양하고도 풍부한 역사적 유물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에 선정된 곳으로, 길바닥에 돌을 세로로 세워서 박았기에 비가 오거나 눈이 쌓여도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이 지방 사투리 ‘칼라드’(Calade)의 좁은 길을 따라 거닐면서 중세로의 시간여행 강추!!!
추천 여행
‘프로방스’(Provence) 지방 ‘보끌뤼즈’(Vaucluse) 지역의 ‘뤼베롱 지방공원’(Parc naturel régional du Luberon)에 라벤다, 올리브, 토마토, 해바라기, 프로방스의 전형적인 농가인 마스(Mas)들의 강렬한 원색 사이로 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인구 약 2천명의 ‘고르드’는 수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유서 깊은 중세 마을이다.
마을의 유래
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나무로 울타리를 세운 정착지 또는 방어요새, 방책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고르드’는 주거지를 둘러싸고 원형으로 만들거나 자연적인 언덕, 강, 바위, 절벽 같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세워졌다. 주변 평야를 잘 감시할 수 있는 언덕 위의 마을 중앙에 우뚝 솟은 웅장한 큰 성은 한때 파괴되었던 것을 1525년 훌륭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 건축한 것이며, 이 마을에서 채취되는 석회암 중에 단단하기로 소문난 « molasse »는 건축자재로 애용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고르드의 돌 »(Pierre de Gordes)은 벽난로나 오븐을 만들 때 꼭 필요한 자재로 유명하였다. 요즘은 버려진 암석 채취장을 전시 공간으로 이용하기도…..
역사 Histoire
8세기에 베네딕틴 수도회의 ‘생 샤프레’(Saint-Chaffret) 수도원이 속세와 먼 이곳에 들어서고, 강력한 ‘기욤 다구’(Guillaume d’Agoult) 가문이 11세기에 주변 마을을 굽어볼 수 있는 언덕 위에 거대하고 육중한 성을 세운다. 역사적으로 침략을 많이 당하다 보니 아마도 자신들의 위용을 과대 포장하여 상대방의 의지를 꺾기 위하여 마을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웅장한 성과 성당을 세운 것이리라….
13세기에는, 근동의 강력한 대영주 ‘사부아 Savoie’ 공작령으로 편입되고, 영국과의 백년 전쟁이 발발하자,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벽을 높이 쌓아 요새화한다. 절대왕권을 이루었던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인 1709년 처절한 흉년과 혹독한 겨울의 한파에 시달린 주민들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712년 남프랑스의 ‘마르세유 Marseille’ 항구에서 시작되어, 유럽전역을 휩쓸어 인구의 절반을 앗아간 페스트가 번지면서 마을이 폐허로 변한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엽까지, 가내 수공업을 위한 누에고치 재배농가와 올리브, 아멍드, 무화과 재배를 통한 경제활동이 번성하면서, 서서히 마을이 번창하기 시작하지만….
가죽신발 세공업자들이 많았었는데, 왼발과 오른발 신발을 따로 만들던 다른 마을들과 다르게, 양쪽 신발을 똑 같은 모양으로 만들던 전통만을 고집한 덕분에 가죽신발 수공업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부 사이,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집과 물레방앗간들이 무너져 내리고, 혹독한 추위로 농작물 수확량이 감소하여, 지역민들의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주민들이 고향을 떠난다.
2차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이 활발하던 곳으로, 철수를 시작한 독일군들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주민들을 사살하였고 맞은편 언덕에 대포를 설치하고는 조준 폭격하여 마을을 파괴시키는 만행을 자행하는데 특히, 연합군들의 추격을 저지하는 장애물을 만들고자 마을 입구와 교차로 주변의 건물 20군데를 파괴하였다. 전쟁 후 복원과정에서 ‘샤갈 Marc Chagall’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협심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된다. André Lhote, Jean Deyrolle, Victor Vasarely, Pol Mara….
생 피르맹 Saint-Firmin 교회
남쪽 경사로를 따라서 약간 내려가노라면 13세기에 지어진 성당 자리에 18세기에 다시 세운 ‘생 피르맹’(Saint-Firmin) 교회를 들려보시길 ! 사각형의 종탑과 감옥으로 사용하던 문이 보인다.
세낭크 수도원 Monastère de Sénanque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10분 정도 이동하면 부르고뉴 지방의 ‘시토’(Citeaux)에서 시작되어 12-13세기 유행하였던 ‘시토회’(Abbaye cistercienne) 수도회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148년에 세운 ‘세낭크 수도원’에 도착한다. 남 프랑스를 소개하는 책자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라벤더 밭으로 둘러싸인 수도원이 바로 이곳 !!!!!
추천 여행
‘까바이용’(Cavaillon) 지역의 대주교인 ‘알팡’(Alfant)과 프로뱅스&바르셀로나 백작인 ‘라몽 베랑게 2세‘(Ramon Berenguer II)의 후원으로 초기 시토회 수도원의 건축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 곳은 현재까지 엄격한 규율 속에 수도원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보리 마을 Village des bories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리’ 마을은 여름철 목동들이나 농부들이 농사철에 이용하던 외양간, 빵 굽는 화덕, 포도주 저장고, 농작물을 타작하던 마당과 돌로 지은 주거들이 모여있다. 최소 3천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 지속된 주거형태로 강력한 미스트랄(돌풍)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튼튼하고 흔한 재료인 돌을 몰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쌓아 올린 이 집들은 현대화 과정에서 숲 속에 버려졌었고, 지금은 선조들의 생활모습과 농기구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이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