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북부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의 ‘칼바도스’(Calvados) 도에 위치한 인구 2만명의 작은 도시 ‘리지외’(Lisieux)는 지리적 특성상 낙농업이 발달하였고 사과 발효주 ‘시드르’와 증류주 ‘칼바도스’를 생산하는 중심지이다. 19세기 말에 ‘소화(小花) 데레사’로 알려진 성녀의 삶은 가톨릭 신자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영향력 있는 신앙 생활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불치병을 치유하는 성수로 유명한 ‘루르드'(Lourdes)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순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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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에 요절했지만, 특유의 실용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영성은 신학자들과 일반 대중들에게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1차 세계대전 당시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Histoire d’une âme )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데레사 성녀의 삶 L’histoire de Sainte Thérèse de Lisieux
‘데레사’는 ‘리지외’와 멀지 않는 ‘알랑송’(Alençon)에서 시계공이었던 아버지 ‘루이 마르탱’(Louis Martin, 1823~1894)과 자수(刺繡) 공예사인 어머니 ‘젤리 마르탱’(Zelie Martin, 1831~1877)의 아홉 자녀 가운데서 막내로 태어났다. 유아 사망률이 높던 이 시기에 5명의 형제가 살아남았지만 ‘데레사’가 4 살 때인 187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은 ‘알랑송’을 떠나 외삼촌이 살던 ‘리지외’로 이사했다. 그는 언덕 위의 아담한 2층 집에서 수녀회 입회 전까지 11년 간 살았다. ‘데레사’가 살았던 집은 건물의 외부뿐만아니라 내부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며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머니 사망 후에 언니 두 명이 ‘카르멜’(Carmel) 회의 수녀가 되자 ‘데레사’는 외로움과 병고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폐렴으로 죽을 고비에서 성모에게 기도하며 살아난 ‘데레사’는 15세가 되던 1888년, 언니들이 있는 ‘카르멜’(Carmel) 수녀원에 입회했다. ‘데레사’ 성녀는 몸이 불편해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불과 24세였던 1897년 9월 30일,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Mon Dieu, je vous aime”란 말을 남기고 숨진다.
1925년 ‘비오 11세’(Pie XI) 교황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일평생 다른 영혼을 위해 보속하는 삶을 가꾼 ‘데레사’ 성녀를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와 더불어 선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했다. ‘데레사’ 성녀의 부모도 2015년 10월 18일, ‘프란체스코’(François) 교황에 의해 시성 됐다. 가톨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부부가 동시에 시성 된 사례였다. 한 가정에서 자녀와 부모 등 3 명의 성인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데레사’ 성녀가 몸담았던 ‘카르멜’(Carmel) 수녀원과 부속 건물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성당 왼쪽에는 ‘데레사’ 성녀 박물관이 자리해 그의 생애와 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성녀의 손길이 닿은 것이면 작은 것 하나라도 귀하게 여기며 전시하고 있다. 성당 오른쪽 부속 건물에는 작은 경당이 있는데 그곳에 ‘데레사’ 성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카르멜’(Carmel) 수녀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데레사’ 성녀에게 헌정된 ‘리지외 대성당'(Basilique Sainte-Thérèse de Lisieux)이 우뚝 서 있다. ‘데레사’가 시성 된 직후인 1929년에 공사를 시작해 1954년에 완성한 이 대성당 내부는 화려한 모자이크와 성녀의 사진으로 빼곡히 장식돼 있다. 이곳의 지하 성당에는 성인품에 오른 ‘데레사’의 부모님 유해가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