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한나절 코스로 다녀올만한 곳…. 자연과 역사가 숨쉬는 숨은 관광명소 중에 유난히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고성이다. 나폴레옹 3세가 가장 좋아하던 ‘콩피에뉴 고성 Château de Compiègne’를 먼저 방문하고, 광활한 숲 속에 우뚝 솟은 피에르퐁 고성을 방문하는 일정 추천!!!
추천 여행
폐허에서 중세시대의 고성으로 새롭게 건설한 유일한 작업으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문화재를 관리, 복원, 유지하는 관점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를 남겨 놓는다. 폐허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 옮은가 ? 당시의 시대를 상상하면서, 새로이 건설하여 새 생명을 주는 것이 옮은 것일까 ?
비올레 르 뒥의 고성 Le château de Viollet-le-Duc
외곽을 중세시대의 모습으로 재현하기 위하여 물을 채워 넣던 해자를 비롯하여 육중한 성문, 들어올리는 다리, 대포 거치대, 망루 등등을 장식용으로 만든다. 중정에 들어서면 오히려 ‘르네상스 문화‘의 특징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괴물형상의 동물과 상상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연극무대처럼…….
중정 중앙에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하던 중세시대 기사의 복장을 한 ‘루이 도흘레앙 Louis d’Orléans’ 공작의 청동 동상이 관광객들을 맞이하여 준다. 건물 내부의 완공된 방들의 실내장식들은 나무판 조각과 석고 조각을 통하여 중세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나폴레옹 1세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와 일벌 문양이 보인다.
역사와 변천과정
‘중세 봉건시대‘, ‘스와송 Soissons’에서부터 ‘부르제 Bourget’ 지역까지 광활한 영토를 자체적인 법과 권력을 가지고 다스리던 ‘니브롱 Nivelons’ 가문이 있었다는데….. 전쟁이 많던 시절이다보니, ‘쌩 쉴피스 Saint Sulpice’ 교회 근처의 바위산에 방어용 성을 만들면서 역사가 시작된단다.
12세기에 ‘나브롱 3세 Nivelon III’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1185년 ‘필립 오귀스트 Philippe-Auguste’ 왕이 이 영토를 구입하여(평화적으로???), 왕실 소유지로 상속되어 오다가 ‘프랑스 왕들‘ 중에 유일하게 미쳐서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샤흘르 6세 Charles VI’가 1392년 자신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Louis ‘에게 주었단다. 정신 없이…..
’루이 Louis d’Orléans’는 1393년부터 3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천혜의 방어용 진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에 주시하였다. 또한, 가까운 ‘꽁피에뉴 Compiègne’ 숲에서의 사냥의 즐거움을 고려하여, 현재의 고성 자리에 사각형의 방어용 탑들로 둘러싸인 ‘동종 Donjon’에 거처를 만들어 정착하면서, 쭈~ㄱ ‘오흘레앙 가문’의 소유지로 남게 된단다.
형 ‘샤흘르 6세 Charles VI’의 정신병이 악화되면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오흘레앙 공작 Duc d’Orléans’ 가문과 ‘부르고뉴 공작 Duc de Bourgogne’ 가문의 암투가 시작된다. 1407년 ‘오흘레앙 가문의 ‘루이’가 암살당하면서, 오랜 시민전쟁이 시작되어, 방어를 위한 요새로 탈바꿈한다. ‘백년전쟁‘ 당시에 ‘아쟁꾸흐Azincourt’ 전쟁에서 프랑스군대가 1415년 영국군에게 완패당한다.
하필, 삐에르퐁 성을 소유한 ‘오흘레앙 가문의 샤흘르 Charles d’Orléans’가 런던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장장 25년간의 볼모 생활을 하고 이 성에 되돌아오면서 복원공사를 다시 시작하여 겨우 완성한다.
역모사건
‘루이 13세’가 결혼한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자 ‘루이 13세’의 동생편에 붙은 귀족들이 반란을 꾸미게 되는데, 이 성의 주인이던 ‘프랑스와 아니발 데스트레 François-Annibal d’Estrées’가 1617년 역모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격노한 ‘루이 13세 Louis XIII’의 명을 받은 ‘히슐리외 Richelieu’ 재상이 피에르퐁 성을 완전히 파괴하여, 페허 상태로 방치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지만 막대한 보수작업을 감당하지 못하고 전전하다가, 1813년 2월 15일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가 단 돈 3,000 프랑에 구입한다. 정권에서 쫓겨나지만 않았어도 복원공사를 시작했으리라…..
복원 과정
페허로 방치되었다가, 1848년 ‘역사유물 Monuments Historiques’로 지정된 이 곳을, 1850년 7월 15일 ‘나폴레옹 3세’가 방문하여, 이 고성의 매력에 푹 빠져 정기적으로 이 곳을 찾는다. 외국의 귀빈이 방문하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근처의 ‘꽁피에뉴 성 Compiègne’에서 환영 파티를 열고, 그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이 곳을 들렸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복원한 건축가 ‘비올레 르 뒥 Viollet-le-Duc’에 의하여, 1858년 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는데, ‘동종 Donjon’과 두 개의 거대한 탑을 살리며 황제의 별장으로 만든다.
‘나폴레옹 3세’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300명의 인부가 쉴새 없이 일을 하였지만, 프러시아와의 전쟁이 발발하던 1870년까지도 완공을 하지 못하였고 ‘나폴레옹 3세’가 전쟁에서 패하면서 모든 공사 중단!!!! 다행히, 중세시대의 고성처럼 복원하고자 노력하였던 건축가 ‘비올레 르 뒥’의 청원으로 국가 지원을 받아서 공사를 지속하였고, 1879년’비올레 르 뒥’이 사망하고 그의 사위’우하두 Ouradou’에 의하여 공사가 마무리된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