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에게 헌납된 마들렌느 대성당의 가장 큰 특징은 성당의 모습보다는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특이함이다.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한적한 늪지대에 불과하였던 것을, 당시의 파리 대주교가 왕으로부터 하사 받고 복토를 하여 경작지로 탈바꿈 시킨단다. 사람들이 이주하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주교마을 Ville-l’Eveque’로 불리어 졌고, 아직도 이 같은 이름의 길들이 있다고…..
‘콩코르드 광장’의 윤곽이 잡히고 나서 ‘콩탕 디브리 Contant d’Ivry’라는 사람이 건축 설계를 맡게 되었는데, ‘앵발리드’의 ‘성 루이 성당 Saint Louis’(현 ‘나폴레옹 무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1763년 8월 13일 ‘루이 15세’가 머릿돌을 놓았고, 시작된 지 몇 년 만에 최초의 설계자인 ‘콩탕 Contant’이 사망하자, 그의 보조 설계사로 일하던 ‘기욤 쿠튀르 Guillaume Couture’가 공사의 책임을 맞게 되는데…. 전임자가 해놓은 공사들을 허물어버리고, 최초의 도면을 대폭 수정하여 ‘팡테옹 Panteon’과 흡사한 ‘그리스 양식‘으로 바뀌어버렸다.
마들렌느 성당의 수난과 변화
1789년 7월 14일에 신분제도의 철폐를 요구하는 ‘프랑스 대혁명‘의 불꽃이 일어나면서, 성당은 약탈당하고 ‘이성의 사원’이란 이름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지하실이 포도주 상인들의 포도주 저장소로 사용되었단다. 1791년에는 국민 공회의 의사당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며, 국립 도서관이나 국립 극장으로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었다고…
‘나폴레옹 1세’는 1806년 이 성당을 개조하여 위대한 프랑스 혁명군을 기념하기 위한 ‘영광의 사원’으로 만들 것을 명하면서, 그리스 사원의 모습으로 지으라고 요구한다. 결국 그의 명을 받들어, 건축가 ‘비뇽 Vignon’이 이전 설계자들이 지었던 건물을 허물어버리고, 완전한 그리스 신전의 모양새를 갖추어가지만, ‘나폴레옹 1세’가 유배를 가면서 공사가 중단 되어 방치된다.
‘루이18세’가 왕위에 즉위하여 ‘부르봉 왕가’의 명예 회복의 차원에서, 혁명 때 처형된 자신의 형 ‘루이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등의 왕족과 귀족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관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영원한 왕정복고를 꿈꾸며….
최초로 ‘생라자르 기차역’이 생겨나고, 철로가 ‘마들렌느’ 자리를 지나가게 되어 1837년 ‘마들렌느’는 기차역이 될뻔한 운명이 되었었지만, ‘프랑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이-필립’이 ‘마들렌느’를 더 이상의 정치적 공간이 아닌 원래 의도대로, 종교적인 공간으로 이용하자는 결정에 따라 1845년 10월 9일 장장 1세기에 걸친 방황을 마치고 본래의 목적인 성당으로 완공된 것이다.
성당이라는 것을 상상할 때 흔히 우리는 종이 달린 뾰족한 첨탑과 그 위로 솟은 십자가를 연상하게 되지만, 높이가 19.5 미터인 52개의 코린트식 기둥들이 화려한 조각과 부조로 장식된 삼각형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성당의 수난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정면의 지붕밑 즉 기둥들에 의해 받쳐진 부분의 부조는 ‘르메르 Lemaire’의 작품으로 최후의 심판을 소재로 한 것이다. 거대한 정문은 청동 도금이 되어있는데, 구약 성서에 나오는 십계를 주제로 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문 양 옆으로는 ‘성 루이’와 ‘성 필립’을 기념하는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천장에 난 3개의 창에서 들어오는 빛만이 내부를 비추고 있어서 어두운 편인 내부에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예수의 세례’를 표현한 ‘뤼드 Rude’의 작품과, 우측으로는 ‘프라디에 Pradier’의 < 성모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식 >이 있고, 성당 깊숙히 ‘마로체티 Marochetti’가 만든 장엄하면서도 아주 화려하며 육중한 제단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은 성모나 예수가 아닌 ‘승천하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성배???
‘프랑스의 왕들‘과 성인들 그리고 교황 ‘비오 7세’와 ‘나폴레옹 1세’를 그린 ‘지글러 Ziegler’의 천정화가 제단 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