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베르의 집, 작은 공원???
프랑스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쏘 공원은 한가로이 산보하거나 운동을 하고, 아이들이 뛰어 놀며, ‘인상주의‘ 화가 ‘마네’와 ’모네’의 작품 < 풀밭 위의 식사 > 처럼 삼삼오오 짝을 지어 피크닉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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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헥타르(1헥타르는 약 3천평)의 면적에 엄격한 기하학적인 도식으로 면을 구분하고, 여러 종류의 나무와 식물이 우거진 숲,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한 수 많은 연못과 분수 등이 어우러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노천 카페에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의 맛이 일품인 쏘 성과 공원!
총리 ‘꼴베르’ Colbert
왕의 고문관을 지낸 ‘루이 뽀티에 Louis Potier’가 1597년 처음으로 이곳에 성을 건설하였고, 절대왕권을 이룩한 ‘루이 14세’의 총리이던 ‘꼴베흐 Jean Baptiste Colbert’ (1619-1683)가 1670년 영토를 사들이면서 성을 확장한다.
건축가 ‘끌로드 페로 Claude Perrault’, ‘앙뜨완느 르뽀트르 Antoine Lepautre’, 왕실 실내 장식가이며 ‘루브르 궁전‘을 장식한 ‘샤를르 르 브룅 Charles Le Brun’, ‘프랑스와 지하흐동 François Girardon’, 그리고 조각가 ‘앙뜨완느 끄와스보 Antoine Coysevox’ ,프랑스식 ‘정원 계획가 ‘르 노트르 André Le Nôtre’ 등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의뢰하여 성으로 탈바꿈을 시킨다.
재무장관을 지내다가 자신의 집 ‘보 르 비꽁트 Vaux le Vicomte’ 성을 너무 화려하게 만든 탓에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하루 아침에 감옥으로 가는 ‘니꼴라 푸케 Nicolas Fouquet’의 사건을 지켜본 ‘꼴베흐’는 왕의 눈치를 살피면서 성을 확장하였으리라. ‘꼴베흐’의 큰 아들이며, 해양 수산부 장관을 지낸 ‘세뉴래 후작 Marquis de Seignelay’ (1651-1690)’이 영토를 상속 받고는 미화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길이가 1킬로미터에 달하는 운하를 파도록 지시하였다.
낚시꾼이 거의 1.5미터에 달하는 잉어를 걷어 올리는 장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고기반 물반…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며, ‘베르사유 궁전’의 성당과 파리의 ‘앵발리드’ 성당을 설계한 ‘줄 아흐두앵-망사르 Jules Hardouin-Mansart’가 당시 유행하던 ‘오렌지 온실 Orangerie’을 건설하였고, 현재는 음악 콘서트 또는 전시실로 이용된다.
‘맨느 Maine’ 공작
‘세뉴래 후작’이 사망한 후 ‘루이 14세’와 애첩인 ‘몽테스팡 후작부인 Marquise Montespan’ 사이의 서자이며, 왕의 총애를 받던 ‘맨느 공작 Duc du Maine’이 새로운 주인이 된다. 서자 출신이었지만 1694년 왕자의 지위를 획득하였으며, 1714년에는 왕의 후계자로 인정되기까지 하던 ‘맨느 공작’이 ‘루이즈 베네딕트 드 부르봉 꽁데 Louise Bénédicte de Bourbon-Condé’와 결혼을 하여, 이 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볼테르 Voltaire’를 비롯한 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이해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성격대로 시인과 연극인들을 초대하여, 화려한 조명과 불꽃 놀이를 동반하는 음악회나 신화 극을 상연하여, 사교계에 선망의 대상이던 < 쏘 공원의 밤 Nuits de Sceaux >이라는 연회를 자주 베풀었다. 요즘도, 여름철에 공원에서 음악회를 열고 있다.
‘뻥띠에브흐 Penthièvre’ 공작
1753년 ‘맨느 공작부인’이 사망하면서 1773년까지 아들들의 소유로 있다가, 절대왕정 ‘루이 14세’의 손자인 ‘뻥띠에브흐 공작 Duc de Penthièvre’이 1775년 이 성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 Marquise Montespan’ 사이에서 태어난 ‘뚤루즈 백작 Comte de Toulouse’의 아들인 ‘뻥띠에브흐 공작’은 ‘브르따뉴 Bretagne‘ 지방의 영주이면서 해군 제독이었다.
또한, 왕실의 힘을 업고, ‘아네 Anet’, ‘앙브와즈 성 Amboise‘, ‘비지 Bizy’, ‘블르와 성 Blois‘, ‘샹뜨루 Chanteloup’, ‘샤또네프 성 Chateauneuf’, ‘외 Eu’, ‘랑부이에 성 Rambouillet‘ 들을 소유한 부유한 부동산가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딸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종형제인 ‘루이 16세’에게 ‘단두대‘ 처형을 찬성하는 표를 던지면서, ‘필립 에갈리떼 Philippe Egalité‘로 불리는 ‘필립 도흘레앙 Philippe d’Orléans’에게 시집을 보내는데,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 되는 ‘루이 필립 Louis-Philippe’의 어머니가 된다.
파괴에서 복원까지
귀족이 학대를 받던 ‘프랑스 대혁명‘의 격동기에는 ‘쏘’ 성이 < 국민의 재산 Bien National >으로 지정이 되어 몰수된다. 공원에 놓여있던 유명한 조각가들의 작품들과 성의 가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오늘날 파리의 ‘룩상부르그 Luxembourg’ 정원이나 ‘튈르리 Tuilerie’ 정원에서 볼 수 있으며, 루브르’ 박물관에도 전시되어있다.
1789년, 해적의 도시 ‘생 말로 Saint Mâlo’의 도매상인이며 유능한 재력가인 ‘르꽁트 Jean-François Hippolype Lecomte’가 영지를 사들이는데, ‘꼴베흐’ 당시에 세워진 성을 철거하고 정원에 나무들을 뽑아버리고 농경지로 만드는데, 다행히 ‘오로흐(새벽) Aurore’ 별장, ‘오렌지 온실 Orangerie’, ‘마구간’, ‘보초막’, ‘관리인 집’ 등등은 현재까지 보존 되어있다.
1828년, 외동 딸 ‘안느 마리 르꽁트 Anne-Marie Lecomte’와 결혼한 ‘트레비즈 Trévise’ 공작이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본래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856년, 건축가 ‘조셉 미쉘 르 수파쉐 Joseph-Michel Le Soufaché’에 의해서 ‘꼴베흐’의 성이 있던 자리에, ‘루이 13세’ 양식으로 붉은 벽돌과 돌을 재료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일 드 프랑스 박물관 Musée de l’Île-de-France
1922년, ‘트레비즈’ 공작의 상속자인 무남독녀 ‘포시니 시스트라 Faucigny-Cystra’ 공주가 영지를 팔려고 매물로 내 놓자, ‘쏘 Sceaux’의 시장이 도의 재산으로 구입하여, 일반인들에게 공원으로 공개하도록 ‘센느 도의회 Conseil général du départment de la Seine’에 간청한다. 1937년, 성에는 ‘일 드 프랑스 박물관 Musée de l’Île-de-France’이 들어서 있다. 1992-1994년 수 많은 기부 작품들을 예술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면서, 다음의 네 가지 테마로 전시실을 꾸며놓고 있다.
1. ‘꼴베흐’에서 ‘트레비즈’까지 ‘쏘’ 성의 변천사
2. ‘일 드 프랑스‘에 존재하던 왕족들의 거처
3. 17세기-19세기 초 사이의 ‘일 드 프랑스’ 정원과 조각
4. ‘일 드 프랑스’의 도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