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들은 ‘자유의 여신상 Statue de la Liberté’ 모델이 흑인이라는 소문도 돌고, 여신상의 발치에 노예제도를 상징하는 쇠사슬이 있기 때문에 노예 혁명을 뜻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노예에서 해방된 의미의 끊어진 쇠사슬은 모든 종류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뜻하는 것이지 유독 흑인들을 위한 상징은 아니다.
만약, 소문대로 ‘자유의 여신상’ 모델이 흑인 여성을 모델로 만들었다면, 미국이 이것을 선물로 받았을까 ??? 지금도 불가능할텐데…. 전 세계에 많은 이복 동생들(?)을 거느린 여신상에 대하여 알고가자!!!
이집트 여인상에서 변화한 자유의 여신상
‘알자스‘ 지방의 ‘꼴마르‘ 태생인 조각가 ‘바르똘디 Bartholdi’는 이집트의 거대한 기념물들에 강한 인상을 받고, 거대한 ‘파라오 Pharaons’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하였다. 마침, 1867-1868년 ‘스웨즈 운하’ 설계가 진행되면서, ‘수에즈 운하 Canal de Suez’의 입구에 세워질 것을 꿈꾸면서, ‘등대’ 역할을 하는 이집트 여인의 모습인 반라의 여인상을 만들어서, 수에즈 운하 측에 보내었지만 퇴짜를 맞았다고…..
운하 입구에 이집트 여인 모습의 등대를 세우려던 계획은 취소가 되었지만….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여신에게 다른 곳에서 행운이 찾아온단다.
공무원이던 친구와 식사를 하던 중,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을 맞아 프랑스 정부가 미국에게 무엇인가를 선물하기는 해야하는데 정하지 못하고 찾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1870년 초기의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여신상 Statue de la Liberté Eclairant le monde’을 바꾸어 만들어서 미국으로 떠난다.
이집트 여인을 닮았던 여인상의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얼굴에 있던 베일을 없애고, 끊어진 쇠사슬과 왼손에 법전이 추가되면서, ‘수에즈 운하’의 등대 ‘이집트 여인 Egyptienn’ 형상에서 유럽인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미국으로 보낸 것이란다. 유럽인의 형상으로 바뀐 조각을 들고, 급히 미국으로 건너가서 자신의 작품이 선정되도록 로비를 하였다는데….
뉴욕 항에 도착하면서 본 ‘베들로 섬 l’île de Bedloe’을 자신의 작품이 설 자리로 점을 찍은 ‘바르똘디’는 체류 동안 중요 인물들을 만나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설득한 결과, 1875년 ‘프랑스와 미국 연합 위원회 Comité de l’Union Franco-Américaine’가 결성되면서 재정 지원을 받아 ‘자유의 여신상’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자유의 여신상 건설 과정과 기술
원작을 바탕으로, 1875년부터 파리의 17구의 ‘샤젤 거리 rue de Chazelles’에 위치한 ‘몽뒤 Monduit’, ‘가제 Gaget’, ‘고띠에 Gauthier’ 의 작업실에서 만들기 시작한단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며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뿐만 아니라 ‘나폴레옹3세’ 제정 시대에 수 많은 작품을 남긴 ‘비올레 르 뒥 Eugène Viollet-Le-Duc ‘(1814-1879)이 여신상의 구조 설계를 맡아서 작업을 시작하고….
히프가 삐죽 튀어나온 (선정적인 이집트 여인상) 초기 안으로 작업을 실행하면서, 엄청난 하중을 히프가 받쳐주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단다. 부랴부랴 튀어나온 히프를 집어넣고 자세를 똑바로 세우면서 치마 주름을 더 부풀리고, 히프를 흔드는 이집트 여인의 모습보다는, 좀더 완고한 이미지의 여신상으로 수정된 것이다.
위원회에 제출된 높이 1.25미터짜리 원형을 2.11미터로 확대하여 만들고, 다시 8.5미터의 높이로 만들어서 이 모델을 정확히 측정하여 4배 키운 것이 현재의 여신상인 것이다. 당시 산업기술로 만들 수 있는 최대 1.4미터의 동판들은 나사로 임시 고정을 시켰다가 미국에 도착하여 다시 조립하였다고…..
비스듬히 자른 각 동판들을 정확히 25센티미터씩 겹치게 포개놓고, 두께 5밀리미터 짜리의 리벳으로 고정을 시켰다는데, 얼마나 정교하였던지 이음새 부분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 이었다. 더군다나, 머리 위의 헤어스타일에 이음 부분의 정교함은 지금도 놀라울 정도라고….
당시 재력가 ‘삐에흐 으젠느 스크레탕 Pierre Eugène Secrétan’이 여신상의 외부를 둘러싸도록 2.37 밀리미터짜리 동판 300장을 기부하고, 정부로부터 최고의 명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흐 Légion d’honneur’를 받은것 까지는 좋았는데, ‘에펠탑‘이 완공되던1889년, 동 값이 폭락하면서 패가망신하였다.
또한, 1876년 임시적인 조립이 진행되지만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기에,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 맞추어서는, 겨우 횃불을 든 팔 하나만을 ‘필라델피아 Philadelphie’에 보낼 수가 있었다.
귀스타브 에펠의 역할
공사는 지연되고, 더군다나 핵심 구조를 설계한 건축가 ‘비올레-르-뒥’이 내부 구조를 완성하지 못하고 1879년 사망하면서 문제에 봉착!!!! 기차를 위한 철교 건설로 유명하던 토목 공학자 ‘에펠 Gustave Eiffel ‘ (1832-1923)이 구조 기술자로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에펠탑‘은 10년 후에나 이야기이고…..
‘에펠’은 먼저 취약하던 구조를 보강하고, 그 위에 5 * 0.8 센티미터의 철 막대로 촘촘히 격자망을 만든 골조 위에 동판을 붙이는 것인데, 기후 변화에 따른 수축과 팽창, 그리고 절연 문제등을 해결해야 하였단다. 수축과 팽창에 대한 문제는 유연한 구조와 옷의 주름으로 해결을 하였고, 동판과 쇠 격자가 우수 (빗물)에 의하여 연결될 경우에, 발생되는 전기에 대한 절연 (누전) 문제는 동판과 쇠 격자 사이에 방수용 도료를 바른 동판을 삽입하여 해결하였다.
1884년 1월에 여신상의 조립이 끝났는데, 미국으로 보내기 위하여 해체할 때까지 파리의 명물이었다고…… 지붕 위로 불쑥 튀어나온 여신상을 상상하면 이해가 될 듯!!!! 완공식을 치르고, 각 부분에 번호를 메기면서 완전 해체하여 총 214 개의 상자를 기차 70 칸에 싣고는, 프랑스의 3대 항구 도시인 ‘루앙 Rouen’으로 보내어, ‘이제흐 Isère’라는 배에 싣고 창작가인 ‘바르똘디’와 함께 5월 21일 미국으로 출발한다.
6월에 미국에 도착하지만, 아직 받침대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4개월 동안의 조립으로 완성된 여신상은, ‘Fort Wood’라는 창고의 안 마당에 서 있었다…… 웬 수난 시대 !!
센느 강에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
센느 강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즐기며 ‘에펠탑‘ 쪽에서 유턴할 때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거주하는 ‘미국인 회 Communauté Américaine’에서 프랑스에 기증한 것인데, 뉴욕의 큰 언니(?)를 1/4로 축소하여 만들었다.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인 1889년 11월 15일 현재의 위치 ‘백조의 섬 l’île aux Cygnes’에 세워지는데, 대통령이 집무하는 ‘엘리제 궁전 Palais de l’Elysée’에 등을 돌릴 수 없다는 이유로 지금과는 달리 에펠탑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세워졌었단다. 하지만, 조각가인 ‘바르똘디’가 “둘이 마주보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기면서….. 1967년 다리 보수공사를 마치면서, 뉴욕의 언니를 마주 바라보도록, 현재의 자세로 방향을 180도 바꾸었다.
룩상부르그 정원의 자유의 여신상
‘소르본’ 대학이 가까이에 위치하고,상원 의회가 있는 ‘룩상부르그 정원 Jardins du Luxembourg‘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창작가 ‘바르똘디 Frédéric Auguste Bartholdi’가 1900년 만국 박람회를 맞아 파리에 기증을 한 것이다.
‘띠에보 형제 Thiébaut Frères’라는 공장에서 높이 2.743 미터의 청동으로 주물 제작된 이 청동상은 언니들과는 등을 돌리고 있는 자세로 비둘기 똥을 맞고 서 있었지만, 2011년 보수공사를 마친 후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바로 옆에는, 9월 11일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애도하기 위하여 심은 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