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프랑스 동영상
고딕 문화
Le gothique 고딕 양식 시기는 12세기 중엽부터 14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중세 기독교 문화를 의미하며, 즉 ‘로마네스크’ 양식 이후부터 ‘르네상스’ 양식이 개화되기 이전까지를 가리킨다. 원래 고딕 Gothic 이란 어원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중세의 건축 양식은 야만인인 ‘고트족 Goth’에게 빌어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비꼬는 투로….. 초기에는 건축, 특히 성당 건축에 국한된 용어로 사용되다가 점차 총체적 영역으로 확산되어, 18세기 말 이후 서유럽 중세 미술의 특정 양식을 가리키는 미술사의 용어로 쓰인다. 고딕 건축의 유물인 하늘로 솟구친 첨탑과 ‘스테인드 글라스‘, 성서를 옮겨 놓은 듯한 조각들, 성경 필사본, 섬세한 표현의 공예품 등은 모두 중세인들의 신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나타낸 것 이라고…. 고딕 건축의 특징 중세 유럽에서 성당은 “신의 집”이자 모든 생활 문화의 중심지로,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점차 대규모 성당이 들어서게 됐다. 고딕 성당은 지역 주민들에게 일종의 긍지의 상징이었으며,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성당 건립에 참여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고….. ‘로마네스크‘ 건축과 비교해 볼 때, 고딕 건축은 첨탑으로 인해 수직선이 강조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며, 육중한 벽과 기둥 보다는 가냘픈 기둥과 넓은 창을 가진 내부는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새로운 미술 양식의 등장은 ‘늑골 궁륭 Ribbed Vault’과 ‘공중 부벽 Flying Buttress’이라는 외부 버팀목의 발명으로 가능하게 된 것!!! 또한 고딕 양식은 건물 내부를 ‘프레스코화’ 대신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빛에 의한 아름다운 채색 효과를 보여주는 ‘스테인드 글라스‘ 고딕 예술의 진수라고 할 […]
대관식 검 (비잔틴)
Epée du sacre 전설에 따르면 이 대관식 검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마뉴 대제 Charlemagne’ (8∼9세기) 것이었다고 전해지지만….. 10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에, (대제의 검이 아닌것으로 밝혀졌지만) 대제의 검이었던 “즐거운 검 Epée Joyeuse”이라고 부른다. 이름만 같은 셈….. 이 검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 때 사용되었던 도구들 중 하나이다. 많은 왕실 관련 물품들이 ‘프랑스 혁명‘ 때 파손되었으나, 다행이 이 검은 파손되지 않아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알고가자, 대관식 검!!! 이 검은 여러 번의 대관식 때마다 보수 되었으며, 그 때마다 유행에 뒤지지 않기 위해 약간의 수정의 가해졌단다. 손잡이 아래의 둥근 부분은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좌우로 균형 있게 배치된 두 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다. 12세기에 만들어진 검의 손잡이 날개 부분에는 단순한 모양으로 날개가 펼쳐진 여러 마리의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13세기에는 여러 장식들이 첨가되었다고..,… 검을 보호하는 칼집의 장식 부분은 금도금한 은으로 만들어져 있고, 커다란 보석들로 장식되었다. ‘랭스 Reims‘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던 대관식에서 미래의 왕은 이 검을 고리 쇠에 걸어 오른쪽 허리 부위에 차고 있었다. ‘나폴레옹 1세‘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1804년 12월 2일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자신의 영웅이던 ‘샤를르마뉴’ 대제를 상징하는 세가지 유물 “즐거운 검”, “정의의 손”, “대제의 왕관”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모두 분실되어, 대용으로 “샤를르 5세”의 검을 대타로 등장시겼다고….. ‘신 고전주의‘ 작가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작품에서 오른쪽 하단부에서 문제의 검, 정의의 손, 왕관을 찾아 볼 수 있다.
로마네스크 문화
Romanesque 로마네스크 문화는 600∼1200년경 중세 유럽의 전지역에 발달했던 예술 양식으로, 고대 로마의 전통적 양식을 바탕으로 ‘비잔틴 문화‘는 물론 ‘켈트’, ‘게르만족’의 전통까지 수용하며 발전한다. 알고가자, 로마네스크!!!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되고, 종교 중심의 생활에서 매개체 역할을 담당하던 성당과 수도원의 건축이 급속도로 발전한다. 유럽에 목재가 풍부했고, 목조 건물이 비교적 건축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에, 로마네스크 이전 초기 기독교 시대인 ‘카롤링거 왕조’나 ‘오토 왕조’ 시대의 건물은 대부분 목조로 지어졌단다. 하지만,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징은 ‘바실리카 양식’의 설계로 본당의 천장을 석조 궁륭으로 바꾼다. 계속되는 전쟁과 약탈로 인한 화재로 목재 건축물이 쉽게 손상되므로, 내화성을 지닌 석조 건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신의 집”으로서의 성당은 항구적으로 보존되어야 했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성당에서는 두터운 벽과 석조 궁륭, 매끈한 석조 벽을 지탱하는 버팀 기둥 등이 발달하게 되었다.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은 아치로 된 궁륭을 만들기 위해 버팀 벽을 두텁게 만들고 채광창을 작게 만들었으나, 점차 원통형, 터널형 궁륭에서 벗어나 첨두 궁륭, 교차 궁륭 등으로 발전하면서, 건물 내부에 더 많은 빛을 받아 들인다. 로마네스크 미술에서 조각은 대부분 성당의 외부 장식은 정문 주위의 부조 조각을 비롯하여 원주나 ‘팀파늄’에 집중되었고, ‘프레스코’와 ‘템페라 Tempera’화는 ‘카롤링거 왕조’와 ‘오토만 제국’의 전통에 따라 내부 벽화를 그리는데 쓰였다. 또한, 자연광을 성스러운 분위기로 연출하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등장하여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은 문맹이었던 신자들에게 종교적 교리를 전파하기 위한 것으로, 주로 성경의 교훈적인 […]
비잔틴 문화
Byzantine 비잔틴 문화는 5세기경 ‘비잔티움 Byzantium’을 중심으로 건설되어, 터키의 ‘오토만 제국’에 의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까지, 약 1천 년간 지속된 비잔틴제국의 빛나는 문화 유산…… 비잔틴 예술이 개화하기 시작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Justinien 대제’ 시기(527-567)와 ‘헤라클리우스 Heraclius’가 통치하던 시기(610-641)이며, 이후 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전역을 위협한 이슬람 세력의 침략은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기도 했다고…. 그 영향으로 726-843년에 이르는 “성상 파괴 운동”은 형상을 띠는 종교적 예술을 침체 시키기도 하였지만, 그 후 843년에는 그리스 정교회가 국교로 공인되며, ‘마케도니아’의 여러 황제들과 ‘콤네노스 Comnène’ 왕조가 통치하던 867-1056년 시기에 비잔틴 역사의 황금기를 맞는단다. 그러나 11세기 중엽, 4번째 십자군 원정에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하고, 십자군이 성지를 점령(?)한 상태에서 동방 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이루고, 무엇인가를 비밀리에 프랑스로 빼 돌린다….. 십자군에 의해 분열된 ‘비잔틴 제국’은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수복하게 되지만, ‘팔레올로그 Paléologue’ 왕조 시대(1261-1453)를 끝으로 터키의 침략에 의해 빛나는 역사의 막을 내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비잔틴 예술은 ‘마케도니아’의 유산 위에 이슬람의 화려한 동양적 예술을 조화시키며, 헬레니즘, 고대 아시아, 페르시아 등 다양한 예술을 흡수하여 발전시킨 비잔틴 예술의 특징은 강한 종교적 색채로, 그리스 정교의 정통 교리와 강령에 충실한 신학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종교 예술과 강력한 왕권의 결합은 비잔틴의 독특한 궁전 예술을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단다. 비잔틴 예술의 커다란 특징은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십자가 모양의 ‘바실리카 양식’이 대표적인 건축 양식이며, 주두나 원주, 코니스 등에 평면적인 […]
사문석 접시 (비잔틴)
Patène de serpentine 사문석 접시는 초록색 돌에 작은 물고기 장식이 금으로 새겨진 접시로 1세기경에 제작된 것인데, 9세기경에 금과 진주, 석류석, 초록색 유리 조각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접시 테가 추가되었다고…. 이 화려한 사문석 성체 접시는 미사 중 사제가 하늘에 바치는 미사 떡을 담는데 사용된 용기로서 ‘성찬배 Calice’를 받치던 것이다. 접시 테의 가장자리는 나뭇잎과 심장을 상징하는 에나멜의 세공 장식으로 장식된 이 아름다운 접시 테는 프랑스 왕 ‘샤를르 2세 Charles II’가 ‘역대 프랑스 왕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생 드니 사원 Basilique de Saint Denis‘에 하사한 것이라고….
샤를 7세 초상-장 푸케 (고딕)
Portrait de Charles VII – Jean Fouquet 왕의 손이 기도하는 모습이 아니고 단지, 방석 위에 올려 놓여진 모습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샤흘르 7세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가 신앙이 독실한 중세시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특이한 경우이다. “가장 위용에 찬 프랑스 왕 Le très victorieux roy de France”이라고 씌여진 이 작품은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영국군을 물리치고, 영토를 회복한 ‘샤를르 7세 Charles VII’ (1403-1461)를 그린 것. 15세기의 유명한 화가 ‘장 푸케’의 초창기 작품으로, 꽉 짜여진 틀이 상징하는 ‘고딕 스타일‘을 보여 주면서도, 샤흘르 7세 자세를 연극 무대에 등장한 배우처럼 커튼 장식 뒷쪽으로 4분의 3정도 비스듬한 정면의 반신상을 묘사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이란다. 프랑스 왕으로의 위엄을 나타내기 보다는, 뭉툭한 코와 자신감 없는 듯한 인물의 특징을 잡아내었다. 누가보아도, 샤흘르 7세 초상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성흔 받는 프란체스코 (고딕)
Les stigmates – Giotto di Bondone ‘프란체스코 수도회 Franciscains’를 설립한 전설적인 프란체스코 성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28편의 작품들에 속한 것인데, 이 그림들은 모두 ‘지오토’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이 성자를 숭배하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순례자들을 위해, 성인이 태어난 ‘아시시 Assise’에 있는 교회를 장식했던 것이었다고….. 젊은 시절 부유하고 걱정 없는 삶을 영유하던 그는 계시를 받고 기도와 빈곤, 그리고 자비의 삶을 택한다. 어느 날 산 속에 고립되어 있는 그의 은둔처에서 기도하던 중, 그는 6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인 ‘지품 천사(세라핌)’를 보게 되는데, 이 천사가 성흔을 프란체스코 성자에게 전해주는 장면…. 이 그림에서는 능숙한 필치에 의해 표현된 선들이 프란체스코 성자와 연결되어 천사의 상처를 전달하고 있다. 즉 손과 발에 있는 각각 두 개의 못 자국과 허리 부분에 꽂혔던 창 자국이 그것이다. 이 장면에서 원근법의 탄생을 엿볼 수 있는데, 비록 모든 부분의 비율이 정확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지오토’는 이 그림을 3차원의 공간으로 구성해 놓고 있다. 프란체스코 성자의 또 다른 기적을 보여주는 내용이 그림의 하단부를 장식하고 있는데, 전원을 배경으로 각 종류대로 둘씩 모여 있는 모든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프란체스코 성자의 뒤에서 놀라운 손짓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통해 그가 단순히 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적을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단다. 실제로 프란체스카 성자는 모든 동물들을 사랑했으며, 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장면인데….. 전설에 따르면 새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을 […]
쉬제르 독수리 (로마네스크)
Aigle de Suger 고대 시대의 흰색 크리스털이 섞인 진한 붉은 색을 띄는 반암으로 제작된 항아리에 양 날개를 펼친 화난 독수리의 머리와 두 발톱(받침 부분) 등 여러 장식품이 첨가된 작품!!! 알고가자, 쉬제흐 독수리!!! ‘쉬제흐 Suger’는 세계 최초의 고딕 건축물인 ‘생 드니 Saint-Denis‘ 성당의 왕실 수도원(현재는 없어짐)을 관리하던 원장이었으며, 동시에 ‘루이 6세’, ‘루이 7세’의 자문관 역할도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부와 권력을 쥐고 있었던 그는 예술품을 수집하였고, 특히 성물들을 입수하여 ‘생 드니 수도원 Abbé de Saint Denis‘을 성물의 보고로 만들었다고….. 첨부된 장식품들은 귀중한 재료로 만들어졌는데, ‘쉬제흐’가 선택한 것은 도금한 은이다. 이 은은 붉은 색이 도는 따뜻한 질감을 부여해 주는 특수 화학 혼합 물질이 사용된 한 겹의 도금을 한 것이다. ‘쉬제흐’는 자신의 이와 같은 천재적인 발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동물의 목 부분에 글씨를 새겨 넣게 하였단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니깐… ‘일 드 프랑스‘의 금세공인들이 ‘생 드니 Saint Denis’를 위하여 제작한 성찬배 Calice’는 워싱턴의 ‘내셔날 갤러리 National Gallery’에서 소장하고 있고, 붉은 무늬의 손잡이 달린 물병과 ‘알리에노 Aliénor’라고 불리는 병만이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아비뇽 피에타 (고딕)
Pietà des-Avignon – Enguerrand Quarton 인물들은 화려한 금빛의 하늘을 배경으로 상아빛으로 입체감 있게 묘사되었으며, 희미하게 보이는 지평선에 보이는 이슬람 풍의 거리…. 알고가자, 아비뇽의 피에타!!! 핏기 없이 어두운 빛을 뜨고 힘없이 늘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시신은 검은 옷을 입은 성모에게 안겨 대칭적인 아름다움과 종교적 비장감을 주는 전형적인 “피에타”의 구성이다. 그리스도를 둘러싼 성모와 ‘세례 요한 Saint Jean’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Madeleine’ 세 인물이 삼각형 구도를 만들며 그리스도 위로 몸을 구부리고, 좌측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리는 헌납자만이 수직의 구도를 지니고 있다. 얼굴 표정이 전혀없는 기괴한 모습이지만, 화가의 해부학 수준을 가늠케해준다. 아비뇽에서 발견된 중세 회화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서,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랜 논란을 걸쳐 ‘까르통’의 작품으로 인정된 것이라고….. 아닐수도????
알페의 성합 (로마네스크)
Ciboire d’Alpais 우리나라 단체 관광객이 잘 안가는 ‘리슐리외’ 관의 예술품 보관소에서 만날 수 있는 화려한 이 작품은 라틴어로 “알페가 이 성합을 제작하였다”라는 글씨 때문에 알페의 성합 이라고 불리워진다. 성합 안쪽의 천사 주변에 새겨진 “Magister G. Alpais me fecit lemovicarum” 글에서, 1200년경 ‘리모즈 Limoges’ 도시에 설치된 ‘리무쟁 Limousins’ 도자기 제작소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뚜껑이 달려 있는 이 성합에는 많은 장식이 되어 있는데, 이 성합이 미사 중에 성체를 모셔 두는데 사용되었던 종교적 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고가자, 알페의 성합!!! ‘아를르 Arles’ 근처의 ‘몽마주흐 Montmajour’ 수도원에 있는 ‘베흐트랑 드 말상 Bertrand de Malsang’ (1316년)의 묘에서 ‘성찬배 Calice’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로마네스크‘에서 초기 고딕 예술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작품으로, 반신상 천사의 모습은 로마 예술의 특징을 띄고 있다.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의 주름진 부분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표현한 것과 컵의 내부에 그려진 윤곽이 뚜렷한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에서 초기 ‘고딕 예술‘을 느낄 수 있다. 두드러지게 표현된 천사의 머리 부분은 이 작품에 입체감을 주기 위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천사에 싸인 성모자 (고딕)
Vierge et l’Enfant – Cimabue 13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치마부에’의 작품으로, 허공 속에 정지된 시간을 통하여 성모자의 위엄을 보여주는 ‘피사 Pisa’의 ‘성 프란체스코’의 제단화로 1300년경에 제작된 것이다. 왕좌에 관람객을 향하여 정면으로 배치하였고, 아기 예수는 마리아의 무릎 위에 앉아서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고 있으며, 유일하게 귀를 그려 넣은 것은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좌를 호위하고 있는 6명의 천사는 아래쪽의 두 천사만 발이 땅에 놓여있고, 다른 천사들은 허공에 정지한 느낌으로 틀 안에 꽉 끼워져 있다. 투시도를 이용한 원근법이 발견되기 전이기에, 2차원 평면인 화폭에 점층법을 이용하여 입체감과 공간 감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치마부에’는 당시에 흔히 이용하던 색깔 끼리의 보색 관계를 사용하는데, 차가운 느낌의 푸른색 계열은 뒤로 물러나는 현상을 주고, 따뜻한 분홍색 계열은 앞으로 나와 보이는 현상을 이용하였다.
필립 포 무덤 (고딕)
Tombeau de Philippe Pot 15세기 말, 군주의 장례행렬을 묘사한 이 조각품은 뛰어난 상상력과 함께 세련됨보다는 엉뚱하면서도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 준다. 중세 귀족들의 장례문화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대리석 판석 위에 누운 기사의 주검을 상복 입은 여덟 명이 엄숙한 모습으로 떠 받치고 있는 이 장례행렬은 중세 말기 귀족들의 무덤에 유행하던 스타일이란다. ‘필립 뽀 Philippe Roche Pot’는 ‘부르고뉴‘ 지방 ‘부르고뉴 공작 Duc de Bourgogne’의 집사인 동시에 ‘샤를르 르 테메레르 Charles le Téméraire’ 사망 후 프랑스 왕의 시종이었으며, ‘루이 11세 Louis XI’를 따르다가 1493년 실종되면서 갖가지 소문만 풍성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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